4·30 재보선 이후 여당은 23:0이라는 충격적인 패배 결과를 놓고 ‘개혁·실용 논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게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여당이 당면한 근본 문제는 국민적 불신이 아닐까?
여당은 4·30 재보선에서 10조원 짜리 공약을 두 개나 내놓았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그 엄청난 유혹을 뿌리쳤다. 왜 그랬을까? 10조원을 우습게 봤을까? 아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그 어떤 여당도 이렇게까지 무책임한 공약을 내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당의 탄생 배경이자 존재 근거라 할 ‘정치 개혁’으로 들어가면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아무리 한국인이 망각에 익숙한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여당 사람들이 눈물까지 뿌려가면서 ‘정치혁명’을 부르짖었던 장면들을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우진 않았을 것이다.
충청권에서 벌어진 이른바 ‘이명수 공천파동’과 ‘염홍철 입당파동’은 충청인들이 이미 여당에 대해 갖고 있던 불신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여당은 득이 되리라 믿고 벌인 일이었겠지만, 정략이 은근한 게 아니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유권자는 불쾌하게 생각한다. 여당은 행정도시 건으로 충청권에서 계속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충청인들은 바로 그런 정략적 속셈에 ‘불신’이라는 빨간 딱지를 내민 건 아니었을까?
지난해 여당이 행정수도 문제와 관련해 정략을 버리고 진실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10·21 헌법재판소 위헌판결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당은 설득과 포용 대신 위협과 대결을 택했다. 대통령부터 행정수도 반대 움직임을 자신에 대한 ‘퇴진운동’으로 선언하였고, 여당 실세들은 ‘제2의 탄핵사태’라고 윽박지르는 오만함을 보였다. 위헌판결이 나오자 여당은 모든 책임을 헌재에 떠 넘기려 들었다. 게다가 올 3월 여당이 무더기로 쏟아놓은 갑작스러운 ‘서울 살리기’ 방안들은 여당 스스로 모든 정략적 속셈을 폭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유권자는 이기적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여당은 신뢰 상실에 대해선 말이 없다. 여당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물론 한국정치라는 게 ‘누가 더 못하나’ 경쟁이기 때문에 야당이 더 못나게 군다면 여당은 가만 있어도 다음 선거에선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간 이해득실을 떠나 그간 여당이 자신들로 인해 한국민주주의가 ‘새로운 역사발전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주장해온 걸 생각해보자면, 여당은 마치 ‘신뢰 파괴’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집단처럼 여겨진다.
더욱 큰 문제는 여당이 내부 비판을 억누르는 문화를 갖게 됨으로써 자기 성찰 기능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내부 권력투쟁용 비판은 무성해도 여당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도 말이 없다. 개혁파와 실용파 모두 감염돼 있는 ‘승리지상주의 중독증’을 외면하고 상호 책임 공방을 벌이는 건 위선이자 기만이다.
심지어 여당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마저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지식인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거리마저 없어졌다. 여당 수뇌부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판을 하면 적(敵)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그게 다 나름대론 개혁을 위한 충정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도대체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여당이 애초 내세운 정치개혁은 절차의 개혁이 아니었던가? 신뢰를 죽이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신뢰는 도덕의 문제다. 도덕 파탄이 초래할 폐해는 그걸 통해 이룰 수 있는 개혁의 가치를 훨씬 압도한다. 개혁 없는 도덕은 희극이고, 도덕 없는 개혁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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