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이 보내오는 메일 중에 스스로 ‘생뚱 메일’이라고 이름 붙인 게 있다. 매주 월·금요일 두 번 보내오는 메일의 내용은 정치인이 보내는 것 치고 정말로 생뚱맞다. 나라가, 북한이 어떻고, 여당 야당 정부 국회 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내용이 일절 없다. 제주도에 갔었는데, 유채꽃이 너무 아름다워 혼자 보기 아까웠다며 사진을 잔뜩 보내는가 하면, 찡하지만 가벼운 교훈적인 유머가 오는 날도 있다. 누구나 스팸 메일 지우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인 요즘이지만 그의 메일은 눈길을 잡는다.
■ 제 아무리 거창한 이념과 주장을 내세운들 인터넷과 분리된 정치는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인터넷은 생활이자 문화로 뿌리 깊이 자리잡은 지 오래다. 정보의 무제한적인 확산은 인터넷 영역을 가히 무정부 지대로 만들고 있다. 시장과 민간, 개인이 주축인 디지털의 세계에서 권위와 규제는 밀릴 수밖에 없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디지털 현상을 미국 국가 정책으로 정착하고 확산시킨 아이라 매거지너 수석보좌관은 1998년 당시 인터넷과 디지털이 제도정치의 무력화와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 같은 시기 공화당 전국위원회의 신기술정책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윈스턴은 민주당 정부에 정책의제를 선점 당한 입장에서도 인터넷 시대를 ‘신 이성의 시대(New Age of Reason)’라고 칭했다. 145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이용해 만든 독일어 성경책 한 권이 성서와 언어 해석의 독점적 권위를 지니던 교회를 무너뜨려 개혁의 원동력이 됐던 대변혁의 의미에 견주는 말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과정은 정보의 개방과 대중적 확산, 이성과 사상의 해방 과정과 마찬가지다. 엘리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주의가 만개하고,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직접·상시화하며, 이 과정의 주역을 개인이 차지하는 게 디지털 정치이다.
■ 그러나 인터넷이 자동 작동하는 대로 무한대의 해체로만 달린다면 디지털 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고 만다. 개인과 공공은 때로 충돌·모순 관계이고, 정부와 대의정치의 부정은 사회에 해악이다. 디지털 정치의 정형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한창의 단계이다. ‘생뚱 메일’이 수신자의 눈길을 끌 수 있다 해서 유권자와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의미 있는 교류 형태는 결코 아니다. 디지털 정치 경쟁에서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우위를 역전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 대선이 디지털에 대한 아날로그의 패배였다면 디지털 시대 대선이 벌써 흥미롭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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