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14) 캐나다 작가 아르캉의 소설 ‘창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14) 캐나다 작가 아르캉의 소설 ‘창녀’

입력
2005.05.10 00:00
0 0

대단히 대담한 소설이 나왔다. 물론 우리나라 작품은 아니다. 여기서 ‘물론’이란 표현은 꽤 암시적이다. ‘물론’ 속에는 ‘당연히’가 숨어 있다. 그리하여 뒤에 나오는 ‘아니다’의 필연성이 강화된다.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편견과 억압을 곱씹어보자는 의미에서 말장난 같겠지만, 다시 한번 반복한다. 대단히 ‘대담한 소설’이 한 권 나왔다. ‘물론’ 우리나라 작품이 아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작가가 쓴 것이라면 각종 매스컴이 내버려두지 않았을 내용의 소설이다. 하지만 출간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선 별다른 논평이나 언급이 드물다. 성에 대한 표현제약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선진국에서나 벌어질 해프닝 정도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더불어 ‘대담한 소설’이란 식의 상투적인 선정성 발언으로 시작해 ‘당연히’가 숨어있는 ‘물론’을 섞어 쓰며 그 소설에 대한 언급을 시도하려는 나의 태도 또한 스스로 마땅치 않다. 이 소설은 알고 보면 그리 ‘대담한 소설’이 아니라는 게 나의 속내이기 때문이다.

‘창녀’(문학동네, 성귀수 옮김)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넬리 아르캉이라는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이 쓴 소설이다. 1975년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이제 서른 하나다.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그녀는 5년 동안 매춘에 종사했던 경험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을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추켜세울 마음은 없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신시아’라는 이름을 쓰는 고급창녀가 매일 남자손님들을 받으면서 느낀 사념들을 일기 형태로 적어나간 것이 전부다. 일기라고는 했지만, 사실에 대한 건조한 기록이나 흔히 상상할 수 있는 ‘한 많은 매춘부’의 자조적인 넋두리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주인공 신시아는 자발적 매춘부이자 ‘창녀 노릇 제대로 한번 해보기 위해’ 대학에 적을 둔 여대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논란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가 매춘에 빠져든 경위를 살펴 보면 소위 ‘돈도 벌고 재미도 본다’는 식의 막돼먹은 여대생의 ‘알바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의 매춘행위에는 스스로의 실존을 실험하는 나름대로 절박한 철학적 근거가 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섹스노동자란 용어 정말 기발하지 않아? 그 말 속에선 세상에 가장 오래 된 직업, 가장 유서 깊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존중의 예(禮)가 느껴져,…(중략)… 쾌락도 일종의 노고일 수 있고, 억지로 도출해낼 수 있으며, 노력을 요함으로써 그로 인해 수당을 받을 수도 있는, 일정한 제약과 표준이 부과되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 말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섹스노동자’란 단어는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이다. ‘노동자’인 만큼 거기엔 경제적,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미국에서 전업주부의 연봉을 계산한 기사가 떠오른다. 그런 게 기사거리가 될 정도로 ‘가사노동’에 적정한 임금을 지급하는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전무하다. 가사노동이든 섹스노동이든 그것이 노동이라면 마땅한 대가가 지급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가사노동에 합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지불되더라도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배우자의 ‘가족수당’ 형태로 생색만 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주부들이 무임금 가사노동에 반발하여 봉기라도 일으키면 어떨 것인가? 남편과의 섹스를 거부해 ‘섹스파업’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의무불이행인가, 자주적 권리의 이행인가? 가부장제의 도덕적 관례 속에 그것은 범죄행위가 될 것인가? 실제로 이런 일은 시한폭탄처럼 잠재돼 있지만,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없다.

가사노동이 권장할만한 도덕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면 똑 같은 부불(不拂)노동에 속하는 섹스노동은 정반대다. 일부 공창제가 발달한 나라의 경우는 논외로 하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섹스노동은 애초에 불법이다. 그럼에도 딱히 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섹스노동은 계속되어왔다. 불법인 채로 꾸준히 이어져 온 이 특이한 노동에 대해 이제 공권력마저 동원돼 제공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철퇴를 때리고 있다. 명분은 여성에 대한 성 착취 근절과 인권 보호라지만, 소위 집창촌 여성들을 피해자인 동시에 범법자 취급을 하는 이중적 시선을 교정하지 않는 한 여성해방도, 페미니즘도 없다. 야밤에 승합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온 포주들의 노예라는 식의 야멸차고도 위선적인 편견만 존재할 뿐이다.

도덕은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해 끊임없는 반도덕을 양산한다. ‘섹스노동’은 항시 구매자가 존재하는 유구한 노동인 동시에 반도덕의 본보기로 억압당하는 이중적인 수난의 시범 케이스다. 여성의 섹스노동이 부도덕하다면 아내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적 갈취를 일삼는 남성들은 창녀보다 더한 범죄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범죄행위를 묵인한다. 세상 참 더럽고 치사하다.

런 점에서 ‘창녀’는 여성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극단적 저항의 한 형태를 예시한다. 수 년 전 출간된 비르지니 데팡트의 소설 ‘베즈 무아’(책세상, 최경란 옮김)가 폭력과 포르노그라피가 결합된 여성 ‘행동주의자’들의 과감한 반격을 그려냈다면 ‘창녀’는 끝없는 몽상과 자멸욕구를 통해 가부장 세계의 야비한 심급을 ‘빨고 또 빨아대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거덜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서 또 다른 ‘고객’을 받는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남성은 대상도 없이 부풀어오른 근육덩어리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죽음 속에 남성들을 몰아넣어 소멸하고자 하는 욕구. 그 죽음은 의외로 깨끗하고 순결하다. 때문에 그녀는 하나도 대담하지 않다. 다만, 그 흔한 고통과 쾌락마저 스스로 분쇄시킨 채 알몸으로 받아들인 이 세상의 더럽고 치사한 일면에 대해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학적인 문제제기만으로 이 소설의 가치를 운위하는 건 좀 심심하다.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매춘에 몰두하는 한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매우 섬세한 언어의 씨줄 날줄로 재구성한 품격 높은 언어의 향연이다. 끊임없는 쉼표로 연계되는 문장들은 감정 없는 섹스에 빠진 주인공의 심리 및 육체의 교착 상태를 단속적으로 드러낸다. 시점은 일인칭이지만, 스스로의 행위와 생각들을 관조하는 또 다른 자아라도 존재하는 듯 사유는 냉엄하고 시선은 싸늘하다. 길고 긴 한 문단이 끝나고 마침표가 찍히는 지점엔 돈과 육체가 맞교환된 이후의 싸늘한 등돌림과 잠정적으로 일단락된 욕망의 공허감이 넘실댄다.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가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설 속에 섹스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매춘부의 자기고백이라는 선정적인 테마는 스윽 지워지고 문장 자체의 밀도만으로 강렬히 팽창했다가 가뭇없이 소진되는 내면의 풍경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골수 깊은 곳에 숨은 언어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부러 매춘에 종사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의도적으로 팽개쳐진 육체의 둔중한 서사시와도 같다.

끝없이 스스로를 ‘되새김질’하며 자아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신시아’(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의 이름이다)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길들여온 세상에 대한 저항을 감행한다. 거기엔 세상이 지정해놓은 체계와 질서로부터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겠다는 처절한 자기보호본능이 존재한다. 남자들의 일방적 욕망과 폭력적인 위계에 알몸으로 맞선 그녀가 꿈꾸는 건 ‘단 한 명의 남자를 통해 모든 게 채워지는 여자들의 대가족’이다. 그것은 그녀가 줄곧 자신의 아버지가 ‘고객’으로 찾아오는 걸 상상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아버지와 교접해 두 딸을 낳고 그 딸들이 다시 엄마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남자와 교접해 또 다시 딸을 낳는 엽기적인 가족구성을 꿈꾼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연유로 이렇듯 괴이한 꿈을 꾸게 됐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발설하지 않겠다.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사서 이 거창하고도 참혹하고, 천박하고도 품격 높은 창녀의 속내를 살펴 보시라. 단, 이 뻑뻑하고 질척한 문장의 숲에서 자칫 자기자신의 얼굴조차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내 긴장하시라는 언질만 살짝 던져준다. 남자에게는 모욕적인 불쾌감을, 여자에게는 쉽게 공감 못할 이상한 연민을 줄 수 있다는 충고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시인 nietz4@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