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딸애인 병민이가 반색을 하면서 "아빠는 벌충을 해야 해. 다른 아빠들처럼 어렸을 때 우리들 공부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대신 이것 좀 해 줘. 번역하는 것 도와 줘" 하는 것이었다.
서양 미술에 관한 것이어서 자신은 없었지만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나를 배려하면서도 제 자존심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꺼내는 아이의 접근법이 마음에 들었다. 1970~80년대 엄혹했던 시절 민주주의를 꿈꾸는 동료들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느라고, 또 그 이후에는 선거와 정치에 쫓기느라고 병민이나 병준이 공부를 마음 먹고 도와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도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는 데야….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끙끙거리면서 진땀을 뺐다. 진이 빠질 때까지 성의를 다했다. 그것도 사흘인가 나흘인가 계속되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날 이후 우리 사이에 마음이 열리고 평화가 증진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느꼈다.
5~6년 전만 해도 상황이 좀 달랐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라면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몇 번은 못마땅해서 내가 소리를 친 적도 있고, 딸애가 울면서 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 적도 있다. 그 때도 그 날처럼 밤늦게 지쳐 돌아와 여고생이던 병민이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고 부탁하면서 일이 생겼다. 내 딴에는 직접 해 먹거나 출출해도 그냥 자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매번’도 아니고 ‘자주’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민이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서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달랐기 때문이리라. 평소 그런 것을 잘 요량해서 아이들에게 좀더 배려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라면 사건’은 처음 생겼을 당시만 해도 큰 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반복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솔직히 지금도 약간은 마음에 걸린다. 혹시 상처가 남아 있다면 "병민아, 미안했다"하고 말하고 싶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딸애가 어버이날 아침에 잠옷 윗주머니에 카네이션을 꽂아주고 출근한다. 그 카네이션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머리맡에 사진으로 모셔 놓고 지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본다. 두 분 다 돌아가신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나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 드는 사진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두 분의 모습은 아직도 너무 생생하다. 특히 제삿날이나 차례를 지낼 때 또는 오늘 같은 날은 그 모습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뛰놀고 자라던 기억, 그리고 그때의 기쁨과 아픔, 슬픔 같은 느낌 하나까지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다. 그 때는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그립다. 내가 사랑하고 또 미워하다 용서했던 분들…. 어버이날을 보내는 오늘 같은 날은 정말 그 분들이 보고 싶다. 가족이란 건 그런 것인가 보다. 고운 정, 미운 정으로 빚어낸 관계,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숙성된 아주 특별한 사이 말이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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