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진 5일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정치인생에서 정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상 처음 노동당의 3기 연속 집권 기록을 세우고, 보수당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최장 재임 기록 11년 6개월 갱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44세 때 최연소 총리기록을 세운 뒤 다시 한번 영국 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희망으로 가득했던 8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비관적인 기운이 맴돌고 있다. 그가 임기 4년을 채울 것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고, 길어야 1년~1년 6개월 총리직을 유지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블레어 총리는 지역구인 잉글랜드 동북부의 세지필드에서 "여야 의석차가 줄었든 어떻든지 영국 국민들은 노동당 정부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 대한 영국 언론들의 총평은 ‘노동당 승리, 블레어 패배’라는 말로 집약된다. 그만큼 정치적 상처가 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의회를 안정적으로 장악할 정도로 여야간 의석차를 벌리지 못한 점이 치명적이다. 645개 선거구 가운데 노동당은 355석을 차지하며 여·야간 의석차는 종전 161석에서 70석 미만으로 현격하게 좁혀졌다.
특히 이를 계기로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 결정에 반대해온 당내 정통 좌파가 블레어의 ‘제3의 길’과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고 총리 사퇴 압력을 가할 여지가 커졌다. 케빈 틱스톤 리즈대 정치학 교수는 "이 정도의 의석차 갖고는 노동당이 의회에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어렵다"며 "블레어 총리는 추진력을 크게 잃었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지의 칼럼니스트 재키 애슐리도 "3기 연속 집권의 포부를 갖고 선거에 뛰어든 블레어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환자가 됐다"며 "블레어가 노동당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노동당이 비싼 대가를 치르며 그를 보호했다"고 지적했다.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도전도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 총리가 선거기간 영국의 이라크전 개전 정당성 논란으로 비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브라운 장관은 노동당을 지탱하는 힘으로 부각됐다. 25%까지 지지도가 하락한 블레어 총리보다 노동당 집권 8년 동안 경제호황을 가능케 했던 경제 수장으로서 브라운 장관의 인기도 높다. 타임지는 선거 기간 ‘블레어에게 표를 주면, 브라운을 얻을 것’이라는 암묵의 메시지를 던진 것도 노동당의 승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표심을 잡기 위해 다음 임기로 미룬 이라크 철군, 유럽헌법 비준 투표, 세제 및 연금 개혁, 핵무기 개발 및 핵발전소 건설 등과 같은 난제들도 블레어 총리의 정치 생명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 "이라크 파병은 잘못" 영국민 民意 표출
영국 총선에서 이라크 전쟁이 결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라크전은 이번 선거전의 사실상 유일한 이슈였다. 지난달 28일 블레어 총리가 불법인 줄 알면서도 전쟁을 감행했다는 문서가 폭로된 뒤에야 비로소 선거가 시작됐다는 말도 나왔다. 1일에는 그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을 일부러 부풀리자는 뜻을 내비친 문건도 공개됐다. 문건에는 하원의 승인을 받기 1년 전인 2002년 4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참전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이슈는 블레어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우선 야당의 공세가 지리멸렬했다. 파병을 반대했던 제3당 자유민주당은 "정당성 없는 파병으로 아까운 젊은이들만 잃었다"며 정책적 판단을 잘못한 노동당 전체를 공격했다. 그러나 파병을 찬성했던 보수당은 "블레어가 거짓말을 했다"며 개인의 도덕성 공격에만 초점을 맞췄다.
노동당도 느긋했다. 노동당은 선거전에서 ‘유권자의 공포심을 일으키는 전술’(Scare Tactics)로 대응했다. 이라크 전에 반대하는 층이 대부분 노동당의 전통적 지지층이라는 점을 이용, "투표를 하지 않거나 야당을 찍으면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다"는 주장을 전파했다.
블레어의 예측은 빗나갔다. 영국의 민심은 여당에게 가까스로 과반수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블레어는 아웃(OUT), 노동당은 인(In)"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파병 반대를 반대하다 36년 동안 몸담았던 노동당으로부터 쫓겨난 조지 갤러웨이 전 하원의원이 노동당 후보를 이기고 당선된 것도 대표적민심 표출이다. 이라크 파병으로 아들을 잃은 전직 구급자 운전사 레그 키즈(52)는 아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블레어 총리의 지역구인 세지 필드에 무소속으로 출마, 10%의 득표율을 얻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슬람인들도 노동당을 반대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블레어 총리는 승리 후 다우닝가 총리 관저 밖에서 기자들에게 "이라크전쟁은 나라를 심각하게 분열시킨 문제라는 것을 잘 안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전문가들은 "앞으로 영국 총리는 해외 파병을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영국 불문 헌법이 군대의 해외 파병 결정권한이 총리에게 있다고 못박고 있지만 의회 승인도 없이 파병을 결정한 블레어 총리에 대한 반발 여론이 노동당을 외면하게 했기 때문이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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