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2차대전 승전 60주년 기념식이 9일로 다가오면서 러시아와 발트해 3국간에 과거사 설전이 뜨겁다. 설전에 일부 동구권 국가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가세하고 러시아가 반발하면서 세계 화합을 다짐하는 이번 기념식이 러시아의 일방적 선전행사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 3국은 "9일은 해방일이 아니라 옛 소련에 병합된 날"이라고 반감을 드러내왔다. 소련군의 점령 이후 36만 명이 살해된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는 행사 당일 스탈린 동상이 제막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불참을 선언했다. 소련의 잘못을 알리기 위해 참석한다는 라트비아의 바이라 비케-프라이베르가 대통령은 "러시아가 스탈린 시절로 회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소련 지배를 경험한 폴란드 의회도 5일 "러시아는 승전 기념과 함께 소련의 동구권 억압을 사과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알레산드로 크바스니예프스키 대통령은 폴란드가 ‘반(反) 러시아’로 비쳐지는 것을 우려해 기념식에는 참석한다. 폴란드는 1939년 독일과 소련의 협공으로 600만 명이 숨졌고, 40년 폴란드 장교 수천명이 학살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발트 3국의 합병은 독일과의 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진 데다 3국도 자발적으로 응했다며 사과요구를 거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5일 독일TV와의 인터뷰에서 "발트 3국 합병에 대해 소련 지도부가 잘못을 시인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며 "사실 3국은 당시 국제정치에서 ‘거스름 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3국 합병에 우리는 이미 사과했다"면서 "매년 사과를 되풀이해야 하느냐"고 반박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런 태도가 서방 진영으로 반감을 확산시켰다. 10일 러시아와 전략적 파트너십 협정체결을 위한 정상회담을 앞둔 유럽연합(EU) 일각에서도 강경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EU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 회원국들은 에너지 확보를 위해 동유럽 회원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 러시아 유화책을 택해왔다. EU집행위원회는 "발트 3국에 대한 소련의 불법성을 인정할 것인지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좌우하는 문제"라는 신중한 입장이다.
미국은 발트 3국을 지렛대로 삼아 ‘자유의 확산’을 꾀한다는 입장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7일 논란의 한 복판인 라트비아에서 발트 3국과 정상회담을 갖고 러시아를 압박할 태세이다. 스티브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1939년 소련의 발트 3국 합병을 인정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취소를 요구해왔다.
이를 두고 러시아 정치분석가 바체슬라프 니코노프는 "러시아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라고 평가했고,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부시의 동유럽 개입은 러시아 정치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 Back-Briefing/ 9일 러 승전60주년 기념식
러시아는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세계 52개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2차 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미국 프랑스 등 전승국들은 물론 패전한 추축국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 정상까지 참석하는 이번 행사는 세계 평화와 화합을 다지는 대형 이벤트이다.
행사는 각국 정상들이 크렘린궁에서 환담한 뒤 붉은 광장의 레닌묘로 이동하며 시작된다. 참전 생존자들에 대한 훈장 수여, 군사 퍼레이드, 세계화합을 강조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진다.
행사 전후에는 각국 정상간 치열한 ‘기념식 외교전’도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석하지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참석하지 않는다. 모스크바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3만여 병력이 거리와 공항에서 검문을 강화해 긴장감도 높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을 러시아의 높아진 위상을 세계에 과시하고 소련 붕괴로 상실된 국민의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해왔다.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심어줘 ‘권위주의적 통치자’란 미국과 유럽의 비난을 피할 명분을 찾는다는 계산도 있다. 기념일 4시간 행사를 위해 1년 전 장관급 인사가 준비위원장에 임명됐고 무려 2억 달러의 비용이 책정됐다.
미국·유럽과 달리 러시아가 9일을 종전 기념일로 경축하는 것은 양측이 각기 다르게 2차 대전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의 결정적 승인을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으로 보고 이날 대규모 행사를 연다. 유럽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45년 1월27일) 기념일 등 다양한 종전행사가 있다.
러시아는 옛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의 유럽 점령지를 해방시킨 날(45년 5월9일)을 전승기념일로 경축한다. 러시아인 2,000여만 명의 희생 속에 레닌그라드 등에서 나치를 막아낸 것이 2차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한편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6일 푸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차기 정부 구성 때문에 기념식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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