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혹은 노상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신문을 펼쳐놓고 읽는 모습은 현대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40년 후에는 이런 모습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인 필립 마이어 교수는 최근에 펴낸 저서에서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독자 수가 감소해 나가면 2043년 초 쯤 지구상에서 신문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일간신문을 읽는 성인독자가 1964년 81%에 달했는데, 2004년에는 54%로 급락했고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40년 후에는 누구도 신문을 읽지 않을 거라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신문의 미래에 대한 예측들 중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이 분석대로 과연 신문이 사라질 것인가? 필자 역시 동의한다. 특히 한국의 신문시장 상황은 미국보다도 더욱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마이어 교수는 신문의 위기를 신문사 내부에서 찾는다. 신문산업은 그동안 안정된 광고수입과 구독료 덕분에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 속에서 다른 어떤 제조업 분야보다도 미래를 위한 투자에 인색했으며, 신문의 내용 역시 독자들의 욕구를 채워줄 만큼 다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 신문에서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신문사 사주가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는 구실로 연일 그 대학에 대한 홍보성 기사를 도배하는 신문, 평소엔 관심조차 갖지 않다가 자사에서 주관하는 마라톤이나 고교야구 대회는 대단한 이벤트인 양 스포츠면의 톱기사로 다루는 신문 등 독자를 외면하는 신문사들의 독선적 자세는 독자들을 스스로가 쫓아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어디 이뿐이었나? 몇몇 주요 신문사와 현 정권과의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갈등이나 언론사끼리의 색깔대립 등이 독자들의 눈엔 사회를 감시하는 목탁으로서의 신문이 아니라 국회 구성원을 이분법적으로 갈라 놓고 세상을 흐리게 하는 방해꾼이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96년도만 하더라도 70%에 육박하던 가정에서의 신문 구독률이 2004년에는 48%로 급락했다. 또한 매체별 신뢰도에서도 신문은 TV와 라디오에 비해 떨어지고 1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인터넷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사회 감시기능과 정보전달 기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신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기존의 독자들은 점점 신문을 멀리하게 되고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의 신문을 구할 방법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신문사의 나태와 자만으로 잃어버린 고객을 감동시켜 그들을 돌아오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더욱 철저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전달하여야 한다. 지금처럼 단순한 뉴스전달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기사가 신문에 넘쳐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지금보다도 탐사보도와 기획보도의 비중을 높여서 독자들에게 사회현상을 더욱 많이 이해하고 세상을 읽는 눈을 풍부하게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어차피 신문은 TV나 인터넷처럼 속보성을 갖기에는 기술적 한계가 높기 때문에 조금 늦게 접하더라도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일부 신문사에서처럼 기자 감원 등 어설픈 비용절감 경영방식은 안된다.
만약 경영주들이 경비절감이란 이유로 기자 수를 줄이고 재투자에 인색하다면 신문의 부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신문의 종말은 정말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제발 마이어 교수의 분석이 틀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길 고대한다.
성동규 중앙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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