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이어 올해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가 겹치면서 ‘국가’ ‘민족’을 둘러싼 논쟁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논쟁의 최전선에는 단연 민족주의의 강화냐, 폐기냐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자리잡고 있다. 국사 해체 담론도 그 논쟁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논쟁은 거듭될수록 원칙론의 반복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지당한 말씀들이 늘 평행선을 달리다 보면, 관객은 어느 순간 이 논쟁이 매우 공허하다는 인상을 얻게 된다. 문제가 현실의 사회현상, 또는 국가정책이나 시민운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국내의 젊은 인류학자들이 세계 각국의 민족이나 종족 문제(ethnicity) 현장을 분석한 글을 모은 ‘종족과 민족’은 민족 문제를 인류학 현장 조사라는 사회과학의 틀로 분석한 참신한 책이다. 책에 등장하는 민족 또는 종족분쟁의 현장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부터, 북아일랜드,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사하공화국, 인도, 말레이시아, 멕시코를 비롯해, 대표적인 복합사회인 미국, 단일민족의 틀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일본까지 다양하다.
식민 통치를 위해 100년 전까지도 없던 ‘요루바’라는 종족이 나이지리아에서 발명되고, 탈식민 과정에서 정치 및 경제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피지 원주민과 이주노동자 출신 인도인이 유혈의 갈등을 벌이는 상황은 종족 문제가 식민주의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 현장이다. 세계화에 따라 일본의 단일민족 신화가 점점 허물어져가고, 멕시코에서 오랫동안 소외와 경멸의 대상이던 혼혈인 메스티소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국가의 문화적 상징으로 부상하는 모습에서는 국가라는 틀 안에서 종족성의 벽이 허물어지거나 조정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종교 갈등으로 포장된 북아일랜드 신구교간의 민족분쟁, 인종이나 민족·종족의 구분과 계급 문제가 뒤얽힌 미국 사회를 통해 또 종족성의 차별이 일상에 얼마나 깊이 투영되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소장학자 10명과 함께 연구를 진행한 서울대 인류학과 김광억 교수는 총론에서 ‘종족(또는 민족)의 특징이란 그것이 필요하다고 인식되는 맥락에서 비로소 표현이나 강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이고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발명과 생산의 주체에 따라 관제 종족성이나 민족성이 있고, 민간에 의한 이른바 사적 생산물로서의 민족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발명과 선택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을 통하여 개인을 초월하여 선험적으로 주어진 문화적 생물학적 요소들을 재발견하거나 강조할 요소를 전략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구성의 방식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서구중심주의라는 폭력을 증거하는 동시에 그 희생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양면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민족 담론이 비단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과 사건이 있는 생생한 현실의 문제라는 엄연한 사실, 해결책이 뚝딱 나올 건 아니지만 적어도 문제의 해법을 발로 현실을 디디고 서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인류학자들의 민족문제 접근법을 보며 절감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