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민족주의자로 절정의 시기에 "천황만세"를 부르며 할복 자살한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 그의 탄생 80년과 자살 35년을 맞는 올해 일본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다.
출판사 신초(新潮)는 총 42권인 미시마 유키오 전집의 완간을 앞두고 있다. 또 가나가와(神奈川) 근대문학관은 공립 문학관으로는 처음으로 미시마 유키오 회고전(6월5일까지)을 개최하고 있다. 26년만에 최대 규모로 열린 이번 회고전에서는 그에 관한 방대한 자료와 새로 발견된 문학노트, 편지 등이 소개돼 그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미시마 작품의 문고본 ‘긴카쿠지’(金閣寺·1956년 발표)와 ‘가면의 고백’(1949년 발표)의 판매량이 각각 340만부, 229만부를 기록하는 등 대중적 인기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한 문학평론가가 "미시마는 죽어서 성장하는 작가"라고 말할 정도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도쿄(東京)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미시마는 탐미적이면서도 이단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곧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1960년 ‘우국’(憂國)을 발표할 무렵부터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기 시작한 그는 최고 인기작가에 오른 때 충격적이고도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미시마는 70년 11월 25일 우익단체 회원 4명과 함께 도쿄 이치가야(市谷) 육상자위대 동부총감부 총감실에 난입, 총감을 감금하고 참모 8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후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외치며 할복 자살했다. 충격에 빠진 일본 대중들은 그의 정치적인 주장을 부담스러워 하게 됐다. 그의 동성애 취향,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뒤섞인 미학에 대해서도 등을 돌렸으며, 그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미시마가 일본에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미시마 충격’에 의한 일본인들의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문학적 재능과 업적을 정확히 따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한구석에는 보수·우경화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도 분명히 반영돼 있는 것 같다.
도쿄=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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