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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어느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 억압에 짓눌린 병든 욕망의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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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어느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 - 억압에 짓눌린 병든 욕망의 끝은…

입력
2005.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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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의 어투를 빌어 말하건대, 주피터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상충하는 이해를 조화시키던 애덤 스미스의 시대는 과연 행복하였던가. 역사를 통해 이미 그 손의 어두운 욕망을 보아버린 우리에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뻔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시간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손’은 천수관음의 형상으로 스스로 찢고 비틀어놓은 온갖 욕망이 내지르는 비명들을 틀어막느라 쉴 틈이 없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억압이 문제인가, 아니면 병든 욕망이 문제인가. 둘 다 문제라면, 판을 엎고 다시 시작하는 것 외에 달리 길은 없는가.

소설가 이평재(46)씨의 작품집 ‘어느 날, 크로마뇽인으로부터’(민음사 발행)는 이 무거운 물음에 관여하는 소설이다.

8편의 단편들은 대개 뒤틀린 욕망의 노예들이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사랑은 없고" "여자는 구멍일 뿐"이라 여기는 바람둥이 ‘나’(표제작), 시어머니 앞에 벌거벗고 누워 애무 받기를 즐기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고양이를 죽여 그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그 혐오와 분노를 달래는 아내(‘고양이 변주곡’), 폭력과 변태성으로 성적 욕망을 달래는 이들…. 외음부 무모증인 ‘고양이 변주곡’의 여자는 옷을 벗어야 하는 곳은 아예 피하고 "심지어 옷을 입어도 풀어헤치지 않고 꼭꼭 몸을 싸매듯 단추를 채워 입"는다. 창녀의 몸에서 난 ‘나’는 성폭행을 당할 뻔한 뒤 이유없이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든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내가 다리를 벌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합니다. …두고 보세요. 아버지의 어떤 자식보다 양다리를 꽁꽁 묶고 살아서…."(‘앤디를 위하여’)

보듯이, 그 왜곡된 욕망들의 배면에는 모종의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부모나 아내의 불륜 혹은 신체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이거나, 돈이나 권력 등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권력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억압에 짓눌린 불구의 욕망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들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분열시키거나 가면을 쓰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그 고통을 속인다. "자궁에서 태어난 존재이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살아온 나야말로 기이한 변종이 아니고 달리 뭐란 말인가."(92쪽)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거짓 투성이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죽음의 편이다. 위인이 죽으면 나타난다는 ‘리아논의 새’를 제목으로 단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미친놈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도대체 리아논의 새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매섭게 따져 묻는다.

7년 전 첫 작품집 ‘마녀 물고기’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걷어낸 바 있는 작가는 이번 작품집에서도 꿈과 잠재의식, 초현실의 세계를 서사의 주무대로 삼았다. 표제작의 주인공 ‘나’는 어느 날 여자 크로마뇽인의 유령을 만난 뒤 성기가 몸 속으로 파묻혀 줄어드는 증상(혹은 환상)에 시달리는 인물. 부활과 윤회를 믿는 크로마뇽인 유령은 시공을 초월하여 돌아다니다가 마음이 비어있는 인간을 만나면 그럭저럭 함께 지내곤 했는데 "지금은 인간이 너무 영악해져 자기처럼 착한 유령은 마음 편히 머물 곳이 없다"고 푸념하는 존재다. 그 무균 순백의 영혼(유령) 앞에 선 ‘병든 성기’는 오그라들어 구멍이 되고, 그 구멍 속으로 그의 육체와 영혼마저 빨려 들어가버린다.

그것은 정화(淨化)가 아니라 무화(無化)이며, 그 함의는 대안 부재의 전복(顚覆)에 가깝다. 작가는 ‘검은 면사포의 계절’에서 실낱 같은 희망의 싹을 틔워놓기는 한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과 엇갈리듯 임신한 사실을 확인하는 ‘나’의 자궁 속 태동은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위태롭고, 그래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병든 욕망들의 신음보다 더.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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