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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아내 강간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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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아내 강간죄

입력
2005.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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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강간, 일반적으로 아내 강간은 인권의식이 발달한 서구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국가가 간섭하지 않았다. 17세기에 정립된 면책 법리가 형법상 강간죄 적용에 불변의 기준이었다. 영국 법원이 "아내는 혼인계약에 따라 자신을 남편에게 내놓았고, 이 묵시적 동의는 철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 만고의 진리처럼 통용됐다고 한다. 다만 별거와 함께 아내의 성(性) 제공 동의도 없어진다고 본 것은 그들답다. 이렇게 오랜 면책 법리가 여권 신장에 따라 비판 받다가 1984년 아내 강간을 인정하는 판례가 미국에서 나왔다.

■ 뉴욕항소법원은 "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여성도 미혼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의 바탕은 부부 한쪽이 일방적으로 혼인계약 파기를 요구할 수 있다면 성 관계 동의도 당연히 일방적으로 철회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 부부 한쪽이 성 관계를 거부할 때 상대방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강간이 아니라 이혼법정으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서구식 합리주의가 뒷받침한다.

■ 영국도 1991년 면책 법리를 폐기했다. 독일은 원래 혼인외 성행위만 강간죄 처벌대상으로 규정, 아내 강간은 처벌근거가 없었다. 1970년 형법개정 때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합의가 있었으나, 내밀한 부부관계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폭력과 강요 등을 입증하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면책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97년 형법을 개정, 아내 강간도 고소 없이 처벌한다. 일본에서는 형법상 아내 강간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다만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 난 경우에 인정한 판례가 있다.

■ 우리는 아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면서도 아내 강간죄는 판례와 다수 학설이 모두 부정한다. 최근 하급법원이 강제추행치상죄를 인정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열린우리당이 아내 강간을 처벌하는 가정폭력특례법을 추진하는 것은 판례와 학설과 사회적 통념을 단숨에 넘어서겠다는 의지다. 야당도 동의한다니 입법 가능성은 높을지 모르나, 실제 제대로 적용될지는 또 의문이다. ‘필사적 저항’도 소용없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판례와 통설을 부부관계에 비춰 볼 때, 일반 강간죄보다 훨씬 입증하기 어려울 듯해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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