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다. 상대방 지도자를 비방하는 극단적인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김정일을 "폭군" 등으로 지칭하면서 포문을 연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다. 협상 상대를 앞에다 놓고 덕담은 고사하고, 온갖 악담을 늘어놓는 것은 대화의 자세가 아니다.
미국이 정말 북한과 협상할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행보는 북한 핵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가지고 놀면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방주의 정책의 명분을 위해 ‘북한 위협론’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차 북 핵 문제가 터졌던 당시 주무 장관이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 특강에서, "미국은 남북 관계가 호전될 때마다 절묘하게 북 핵 의혹을 제기했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북 핵 문제는 2002년 10월 "북한이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시인했다"는 미국 정부의 일방적 발표로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우라늄 농축 핵 개발 계획을 시인한 적이 없다. 미국의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에 대해 구체적이거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언론을 통해,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조에 필요한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을 수입했다는 것을 흘렸을 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핵 개발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미국은 똑같은 내용을 이라크의 핵 개발 증거로 제시했다가 거짓으로 드러나 국제적 망신을 산 바 있다. 그 합금은 의료기계 제작을 비롯해 민수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 다른 증거로 제시해 온 것이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 칸 박사 네트워크와의 관련설이다. 칸이 북한의 핵 개발을 지원했고, 북한에 가서 핵무기를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칸 박사나 파키스탄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없다.
최근에는 불확실한 ‘6불화우라늄’의 리비아 이전설을 흘리기도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6불화우라늄’은 우라늄 농축 이전 단계의 물질이기 때문에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미국이 얼마나 궁색하면 ‘6불화우라늄’을 꺼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레이저법을 이용하면 실험실에서도 농축 우라늄 생산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레이저법은 미국도 상업생산을 포기한 방법으로 ‘실험실에서만’ 극소량의 생산이 가능한 방법이다. 북한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미 핵 실험을 했다는 주장도 황당무계하다. 시뮬레이션을 통한 핵 실험은 미국만이 보유한 기술로서, 북한에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슈퍼 컴퓨터가 있을 리도 없다.
이처럼 2차 북한 핵 문제의 발생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부린 농간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북한 핵 개발 시인" 발표가 터진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해교전으로 다소 소원해졌던 남북관계는 부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다시 화해 분위기로 돌아섰고, 8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평양에서 다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처럼 한반도에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급속한 냉전 해체의 조짐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대해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책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당초에 제기한 고농축 우라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고사하고, 북한을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아 사태를 악화시키고, 오히려 북한을 플루토늄을 통한 핵 개발로 몰아갔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이런 의혹들에 대해 분명히 해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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