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너희만한 딸들이 있단다. 큰 애가 다니는 학교는 고3학생이 커닝했다는 질책을 받고 뛰어내린 학교와 이웃해 있고 둘째가 다니는 학교는 집에서 뛰어내렸다는 고2학생이 다니던 그 학교란다.
그런데도 나는 너희들이 왜 죽기까지 해야 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제도가 너희를 죽였다는 비판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단다. 고2인 첫째는 어려운 영어나 물리를 학원 다닌다는 친구들한테 배워나가고 있고 둘째는 내신 강화로 친구가 적으로 변했다는 고1인데도 시험을 앞두고 친구한테 공책을 빌려주었거든. 어서 시험이 끝나 반 아이들과 놀러갈 생각을 하니 그건 절대로 친구 관계이지 적은 아닌 것 같아. 무엇이 문제였든 너희들이 머리 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고 그 고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7년전쯤 영화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 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장점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스스로에 대해 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대답하더라. 실패하거나 실수했을 때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능력이 최고의 장점이라는 거야. 전세계에서 모인 최고들과 경쟁해야 하는 할리우드에서 실력 차이라는 것은 미약하다지. 그래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다보면 긴장감을 조절하지 못해서 스스로 무너져버리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거야. 너희들도 오히려 학업에 뛰어난 아이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을 보면 스스로에 대해 웃을 수 있는 능력을 배우지 못해 이토록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쟁이란 불가피하다는 것, 그러나 경쟁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겠지. 그리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거야.
한국일보에 학자분들이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를 쓰면서 털어놓는 이유 가운데 내게는 종교학자인 정진홍 교수님이 하신 ‘살기 위해서’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어. 교수님은 청소년기를 보육시설에서 자랐단다. 부모님이 계셨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했거든.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사는 길이었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미래 세대의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똑똑한 사람은 온 사회가 공부와 생활을 지원해주는 분위기였지.
나는 70년대에 중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찾아왔던 초등학교 동창이 잊혀지지를 않는단다. 그 애는 집안이 가난했고 공부도 잘하지 않았던 터라 학교를 졸업하고는 빵집에 취직을 했어. 밤새도록 빵을 만드느라 잠 안오는 약을 먹는다느니 그래도 빵은 양껏 먹을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어. 어른이 되면서 내가 누리는 안락이 이런 친구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생각을 하면 어서 사회에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지. 아울러 그런 친구를 알게 해준 초등학교 교육에 감사한단다. 고등학교도 평준화 학교였지만 그때만 해도 가난한 집은 딸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았거든.
최근에는 가난한 딸들도 고등학교를 가지만 학교 자체가 빈부의 차이에 따라 갈라져 버렸고 부자 동네의 학교가 명문대를 더 많이 보내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지. 그래서 내신이 강화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교육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고리가 깨질 것이라는 기대로 반가웠단다. 그런데 너희들의 죽음으로 일부에서는 엉뚱하게 내신 강화 자체를 비난하는구나. 부모의 지원이 아니라 학생의 자질이 바르게 평가받아야 공정한 경쟁이라는 사실을, 거기에 보태어 대학입학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쯤 모두가 동의할까.
인생이란 수천 수만의 기회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조금만 참았더라면.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니 살아있는 네 또래들만이라도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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