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한테 말할 게 있어요."
하루 종일 멍하니 병실 TV 앞에만 붙어 있던 도널드 허버트(44)씨가 불쑥 입을 열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한 것이 10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귀를 의심한 요양원 직원은 가족한테 황급히 전화를 했다. 13세인 아들 니컬러스군이 받은 전화를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니컬러스는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아기라서 전화를 받을 리 없다"고 허버트씨는 손사래를 쳤다. 정확히 10년 전, 기억을 잃기 전의 허버트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로 미국인들이 흥분하고 있다. 3일자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주 버팔로의 소방관이었던 허버트씨는 화재 현장에서 뇌 손상을 입고 기억상실 상태가 됐다. 사고가 난 것은 1995년 겨울. 아파트 화재 진압 현장에 투입된 그는 다락방에 있던 피해자들을 찾던 중 지붕이 무너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현장에 6분간 쓰러져 있던 그는 동료 소방관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외상성 충격과 산소 부족으로 인한 뇌 손상으로 2개월 반이나 혼수상태를 헤맸다. 이후 상태가 좋아져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됐으나 시력은 거의 상실했고 "예" "아니오" 외에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자기 직업이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족들조차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기억상실에 빠진 것이다.
오랜 어둠에서 깨어난 그는 사고로 의식을 잃은 것을 3개월 전쯤 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 앞은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만 듣고도 옛 친구들을 구분해 낼 정도로 기억은 또렷하다. 가족과 친구들 이름도 철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장모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위를 위해 기도했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모든 일은 신의 손에 있다"며 울먹였다.
전문가들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산소 부족으로 뇌 손상을 입은 환자 중에는 사고 후 수개월 이내에 회복되는 경우가 15%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기억상실증이 2년 이상 장기간 계속된 경우 회복된 사례는 거의 보고된 바 없다"며 "비슷한 처지의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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