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업계는 요즘 무척 바쁘다. 한때 뉴미디어로 불리던 케이블, 위성, 인터넷은 이제 올드 미디어가 되고, 모바일,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유비쿼터스, 인터넷프로토콜TV(IP-TV) 등 진정한 뉴미디어가 빠른 속도로 도입되고 있다. 뉴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혁명과 같은 ‘미디어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며 홍보에 열을 올린다. 어떻게 튈지 모를 뉴미디어를 어찌됐든 시장에 조기정착 시키기 위해 일단의 업계 사람들은 인위적인 시장을 조성하고 정부의 규제정책을 완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뉴미디어를 제대로 받아 줄까 하는 노심초사나 위기 의식 또한 역력하다.
한꺼번에 다수의 경쟁자를 만난 신문과 방송, 이른바 올드 미디어들은 드러내 놓고 ‘위기’를 부르짖고 있다. 다매체 다채널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비교적 고정적이고 흐름의 방향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디어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바일, 아무데서나 미디어가 나타나는 유비쿼터스, 미디어끼리 얽히고 설키는 디지털 융합 현상 등은 말 그대로 혼돈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작금의 미디어 상황은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 양쪽의 혼돈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양쪽의 사람들은 당장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수습하느라 바쁘고, 그보다도 이 혼돈의 가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허둥대느라 더욱 바쁘다. 미디어 업계 사람들은 정체 모를 혼돈을 가리켜 위기로 규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위기의 정체를 모를 때 찾아오는 법이다. 지금의 미디어 위기는 사실상 미디어 혼돈에 불과하다. 혼돈은 시간이 지나면 질서를 잡아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미디어 주체들은 사멸하거나 다른 조직에 흡수될 것이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미디어가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침몰하고 있는 일부 미디어 조직에서 터져나오는 위기는, 따라서 위기가 아니라 엄살 또는 비명 소리에 불과하다.
미디어 위기는 혼돈스럽게 보이는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생성 소멸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더 무서운 위기는 미디어의 혼돈 현상에 압도당해 도대체 왜 뉴미디어를 도입해야 하는가를 묻고 자성할 수 있는 공간마저 묵살되는 미디어의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시청자 주권 시대 등 그럴싸한 수사와 함께 등장한 케이블이나 위성 방송이 도입된 지 꽤 됐지만 이런 미디어들이 우리 사회를 바르게 하고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인터넷 포털, 모바일, DMB 등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대화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런 뉴미디어가 사람들이 공공의식을 갖게 한다거나, 우리 사회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든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
위기로 치면 현란한 뉴미디어 현상에 휘둘린 사람들이 더 이상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책을 읽지 않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 걱정이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심사숙고 하고 서로 만나서 공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탱해 주는 사회적 자본이다. 늘어나는 텔레비전 채널에서 쏟아 내는 선정적이고 말초적인 프로그램에 열중하느라, 또 신기하기만 한 이동식 통신수단과 게임기에 몰두하느라 사람들은 만나서 건전한 대화를 나누는 일에 점차 머쓱해 하고 있다.
뉴미디어의 조기 도입은 국내, 또는 국제적인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뉴미디어 도입과정에서 동원되는 시장과 산업 논리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침탈하는 장면은 참담하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뉴미디어인가.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