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사랑 얘기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전통과 현대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극 강국’ 리투아니아의 연출가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36)가 5~7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서울을 찾았다. 2002년 서울공연예술제에서 ‘불의 가면’을 선보인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코르슈노바스는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 리마스 투미나스와 함께 세계 연극계에 리투아니아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 1990년 리투아니아 국립 드라마 씨어터에서 ‘데어 투 비 히어’(There To Be Here)로 데뷔한 그는 그 해 같은 작품으로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프린지 퍼스트상’을 받았으며, 93년 페테르부르크 연극 페스티벌에서 ‘최고연출가상’을 수상,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99년에는 자신의 이름 첫머리를 딴 O.K.씨어터를 창단해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 사라 케인의 ‘크레이브’ 등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에 선보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대 작품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찾고 고전에서는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찾으려는 그의 연출 세계가 그대로 배어나는 작품이다. 16세기 이탈리아 베로나 지방 몬태규가와 캐플릿가의 갈등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현대의 피자집으로 옮겨 재구성했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사랑 때문에 두 주인공이 목숨을 저버리는 결말은 원작과 똑같다. 칼 대신 밀가루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밀가루는 앙숙관계인 두 집안이 온갖 반죽을 만들어 내며 경쟁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위한 데드 마스크로 이용되기도 한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음을 선택할 때 독약 역할도 한다. 그러나 밀가루는 극을 장식하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중요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코르슈노바스는 "피자집은 전통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는 바뀔 수 있지만 음식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집안의 맹목적 갈등은 전통에서 비롯됐습니다. 음식의 재료인 밀가루는 전통을 의미합니다. 전통은 사람들이 그날그날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지만 죽음으로 몰아 넣는 증오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밀가루를 통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코르슈노바스는 전통의 폐해를 알아차린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을 통해 폐쇄적인 전통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오늘과 내일이 아닌 어제에 의해 현재를 살아간다면 우리가 먹는 빵은 독약일 뿐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도그마가 삶을 지배한다면 사회든 국가든 세계든 파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전작 ‘한 여름 밤의 꿈’에서 판자만으로도 환상과 낭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코르슈노바스는 "연극의 힘이 단순한 소품 뒤에 숨겨진 상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연극은 무대가 아니라 관객들의 상상력 위에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약 배우들이 상상의 공간에 들어 갈 수 있다면, 연극은 영화나 다른 예술보다 더 많은 표현 가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02)2005-0114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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