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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수능 등급제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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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수능 등급제에 거는 기대

입력
200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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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수능시험은 더이상 점수로 표시되지 않게 됐다. 응시 영역 및 과목별로 수험생의 성적을 9등급으로 나누어 해당 응시자의 등급만을 제공하게 된다. 새로운 제도의 세부적 사항에 대하여는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으나, 근본 지향점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유명학원에서는 입시철마다 ‘배치표’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수험생들은 A대학의 화학과를 선택할지, B대학의 생물학과를 선택할 지의 문제를 배치표에 표시된 지원가능 점수에 의존해 결정해 왔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원했던 다른 대학, 다른 학과에 갈 성적이 못 되어 지금의 대학, 학과로 밀려와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학생에게 일말의 좌절감 내지 열등감을 맛보도록 강요하는 구조를 ‘진학지도’라는 미명하에 유지하면서 대학의 서열화와 과외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선전해 온 배치표가 이번 수능 제도의 변화와 함께 영구히 매장되었으면 한다.

대학 간, 학과 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차이를 가늠할 자료가 제공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펴고자 함은 아니다. 화학과를 지망하려는 학생에게 어느 대학의 화학과가 어떤 이유로 더 우수한지, 어떤 측면에서 강점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자료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이다. 교원의 연구업적과 역량, 도서관 및 실험기자재의 수준, 교수 대 학생 비율, 장학제도, 후생지원의 현황, 졸업생의 취업상황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비교 설명하는데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자료분석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학지도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 근거도 없이, 오로지 간판과 인기와 직관적 느낌에 기초하여 A대학 화학과, B대학 전자과, C대학 영문과 등을 관통하는 서열을 정하여 둔 배치표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진학지도를 대신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속물주의를 가감없이 반영하고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입시철만 되면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찾아 헤매듯 배치표를 찾는 이유는 속된 말로 같은 값이면 ‘한 끗발’이라도 더 나은 대학의 간판을 챙기는 것이 장땡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박판을 방불케 하는 입시전쟁의 현장에서 누가 감히 학생의 적성과 선호와 흥미를 운위하랴!

수능제도의 변화로 배치표의 작성이 불가능하게 되면 당장은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중독자가 내지르는 아우성마냥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수험생이 혼란을 겪는다느니, 진학 지도에 어려움이 있다는 등 볼멘 소리를 내뱉기 전에 겸허히 자신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번도 제대로 진학지도를 해 본 역사가 없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배치표가 나도는 한 진정한 진학지도는 조롱과 냉소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지원자의 적성과 장래 진로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려면 배치표가 사라져야 한다. 배치표가 사라져야 비로소 각 대학, 학과의 진정한 수준과 교육 여건에 대한 탐구가 시작될 것이다. 배치표가 없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A대학 수학과에 입학하는 학생이 B대학 국문과에 입학하는 학생보다 우수하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서열의식이 자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치표를 갈구하는 자들은 이처럼 서열지울 수도 지워서도 아니 되는 대상들 간에 서열을 일목요연하게 지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이제 단호히 거부되어 마땅하다.

수험생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다른 희망과 적성과 선호를 가지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당연하고 소중한 사실은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다. 2008년부터 도입되는 수능 등급제가 수험생을 그저 점수로 치환하여 적성과 개성과 분야를 막론하고 한줄로 세우는 지금의 기이한 제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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