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게 3년 정도 전이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스케일 크게 말아먹은 작품이라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대한 논란이 심했을 무렵이다. 영화를 봤든 그렇지 않든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선우를 욕했다. 그 당시 다니던 직장엔 영화광들이 많았는데,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일관되게 장선우를 욕했다. ‘사기꾼’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장자 운운하며 도사 흉내내는 것도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욕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나로서는 그때 그들이 그렇게 비분강개하는 게 황당했을 따름이다. ‘백억 넘게 돈 들여서 그 따위 장난질이나 치냐’는 게 요지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괜히 삐딱해져서는 ‘당신들 돈들인 것도 아닌데 왜 난리냐?’고 무식하게 따지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지는 않았다. 나는 당시 ‘성냥팔이’를 보지 않은 상태였다. ‘장선우를 위한 변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날, 해물잡탕밥이 맛있었던 중국음식점을 나오면서 하게 됐었다.
그렇지만 여태껏 나는 그 글을 쓰지 않았다. ‘성냥팔이’도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 비디오로 봤다. 그런데 끝끝내 그 영활 다 보지 못했다. 세 번 시도했으나 세 번 다 중간에서 잠들고 말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장선우를 잊어갔다. 한때는(대략 ‘거짓말’이 나올 무렵) 한국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시들해지면서 알게 모르게 무감해졌다. 잡지나 TV같은 데서 얼굴을 보게 되면 오래 전에 내왕이 끊긴 동네 형님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갑게 인사했다가 단 서너 마디 만에 서먹해지는 그런 사이 말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임을 전제하고 말하자면, 장선우는 ‘날라리’다. 그것도 머리가 약은 여시 같은 날라리다. 그는 김정환이나 황지우, 그리고 지금 총리로 있는 이해찬 등이랑 함께 유신시대 운동권 출신이다. 운동권 굿판이나 연극판 등에서 암중모색하던 그가 영화를 하게 된 건 ‘80년 광주’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증언엔 ‘놈들이 탱크를 몰고 오는 판에 꽹과리 장고나 두드리는 게 요령부득으로 여겨졌다’는 둥의 고백이 있다. 그 이후 그 유명한 ‘카메라의 양심선언’이란 비평문이 나왔다. 그 무렵, 장선우는 다소 엘리트주의 요소가 강한 박광수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카메라를 메스로 삼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총아로 통했다.
장선우의 본명은 장만철이다. 장선우란 이름은 그가 영화판에 막 뛰어들 무렵 사숙했던 선우완 감독의 성을 딴 것이다. 선우완 감독과 ‘서울 예수’란 영화를 공동연출했지만, 검열문제로 도중하차하고 안성기랑 이혜영이 나온 ‘성공시대’로 입봉하게 된다. 선우완은 한참이 지난 90년대 후반, 신현준, 심혜진, 이정현 등을 데리고 ‘마리아와 여인숙’이란 이상야릇한 영화를 찍고 난 이후 다시 소식이 없다. 이장호의 조감독도 했던 걸로 아는데 정확하진 않다(배창호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판에 뛰어든 초창기 때 그를 따르던 인물이 여균동이다(‘성공시대’를 유심히 보면 어수룩한 더벅머리를 한 여균동이 조연으로 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사는 하나도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후, ‘우묵배미의 사랑’, ‘화엄경’, ‘너에게 나를 보낸다’, ‘경마장 가는 길’ ‘꽃잎’ 등을 발표하면서 찍는 영화마다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한국의 올리버 스톤이 됐다.
장선우는 자칫 추문에 그칠 내용에서 삶의 적나라한 내면을 까발리는 데 탁월하다. 무엇보다 그가 잡아내는 여관 씬 (특히 ‘우묵배미’와 ‘경마장’ 등)은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그건 홍상수의 특장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홍상수가 잡아내는 여관 씬은 불쾌한 데가 있다. 굉장히 건조한 듯 보이는 홍상수의 카메라는 특정한 정황과 정조를 미리 철저하게 계산해놓은 상태에서 최대한 현실의 그림과 일치하게끔 재연해낸다. 그의 특출한 즉흥마저도 뚜렷한 극적 계산의 소산이다. 따라서 닳고 닳은 남녀들의 애정 행각을 까발려내는 그의 짓궂은 시선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애욕에 달은 남녀의 심리를 엄정하게 관찰하는 차가운 시선만 존재할 뿐이다.
장선우의 끈적하고 비틀린 골계미에 비하면 홍상수의 카메라는 인간 심리마저 자로 댄 듯한 엄격한 카메라의 메커니즘 속에 종속시켜 버린다. 그건 감정의 찌끼들을 모아 감정의 불포화지점을 소진시켜 버리는 홍상수 만의 새침한 미학이다. 그런데 그건 내 감각엔 상당히 불편한 관조다. 한 친구가 홍상수의 영화를 ‘포르노’라고 적시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인간의 비루함에 별다른 공감을 느낄 수 없었기(또는, 공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장선우를 위한 변명’을 쓰는 내가 ‘홍상수를 위한 변명’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장선우의 영화를 보며 장선우라는, 약간은 특이한 괴짜에게 끌릴 뿐이다. 그러니 영화의 완성도는 오히려 부차적인 게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장선우에게 끌리는 건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스타일은 그 특유의 머털도사 머리와 뜬구름 잡는 듯한 어법, 세상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태도와 (소문으로 들리는)여자밝힘증, 그리고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마인드 등이 다 포함된다. 내가 보기에 장선우에게 영화는 절차탁마하여 용왕매진해야 하는 지고한 예술적 가치가 아닌, 삶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을 점검하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이자 스스로의 멘탈리티를 검증하는 의식적 호사행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사기꾼이라 불리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 무심해지거나 심지어는 세상의 그런 평가를 즐기려 드는 자아를 실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 선무당 사람 잡는 소리지만, 단 한번 스치듯 만난 인상과 작업물 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건 결국, 자기자신의 취향과 입장을 투사하는 일에 다름 아니겠는가. 따라서 장선우의 영화를 볼 때 느끼게 되는 맹목적인 호의가 단순히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되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라 장담한다. 무식하게 말해서 장선우가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을 향해 뻔뻔스럽고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그만의 파이트 머니, 또는 유흥비를 뜯어내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뒤죽박죽 뒤엉켜 옴팡지게 망가져도 보고, 사고쳐서 도망도 다녀 보고, 마음껏 주색잡기에 빠져도 보고, 폭삭 늙어버린 동년배들의 엄살로부터 귀도 막고, 점점 꼰대의 나이가 돼가는 스스로에게 염장도 질러 보고, 악인도 돼보고, 도사 흉내도 내보고, 세상한테 떼도 써보고….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막 살면서 명성도 얻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 황야의 총잡이처럼 훌쩍 사라져서 낚시질에나 몰두한다면. 장선우는 그 모든 자아의 변종들을 카메라를 가지고 실험한다. 그러니 그의 영화는 다중인격자가 되기 직전에 순진하게 웃어버리는 망나니의 낙서장과도 같다. 콤플렉스에 짓눌린 엽기살인마 보다는 소위 ‘문화적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장난꾸러기가 백 배 더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인간이 아닐까. 게다가 영화가 재미있기 까지 하다면 그는 빈대에다 흡혈귀까지 동지로 가진 셈이다.
1990년대 이후 급작스레 호황을 맞이한 한국영화산업에 있어 장선우는 내치기도 껴안기도 애매한 계륵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더 빨리 사라져버린 동년배 감독들에 비하면 그나마 그는 아직도 기대할 게 더 많은 감독이다. 두어 달 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요즘 그는 몽골 유목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가족용 판타지 영화’를 준비하며 한창 몽골 원정에 나서는 중이라고 한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몽골 현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과 초원을 말달리며 촬영할 생각을 하며 그는 몹시 달떠 있는 인상이었다. 이 글은 그런 그를 인터뷰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몇 가지 사정으로 유야무야되면서 대타로 끼적댄 것이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소위 ‘성냥팔이 소녀의 재난’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는 장선우 감독을 굳이 변명까지 하려 했던 건 순전히 개인적인 불만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소위 ‘날리고 있는’ 요즘, 나의 중뿔난 심사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에 홀연히 나타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던 몇몇 잊혀진 감독들에게 마음이 간다. 단적으로 말해 이두용 이장호 등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개성파 감독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가 하는 것이 내 불만의 요지이다. 한국영화계에 임권택 정도를 제외하면 현재 활동 중인 노장급 감독은 전무한 실정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준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과 확고한 신념은 나의 이런 불만을 가일층 부추긴다. 아울러 그것은 ‘올드보이’나 ‘살인의 추억’ 같은 메이저급 ‘웰메이드’ 영화를 보며 그 때깔 좋고 스타일리쉬한 화면에 이물감이 들었던 이유에 대한 자체적인 해명이기도 하다. 나는 왜 미끈한 청년의 영화가 싫을까? 이거야 말로 아이처럼 짓까불다가 꼬장꼬장한 노인네처럼 엄숙 떨기를 반복하는 내 영혼의 다중인격 탓이 아닐까? 어쨌든, 아직까지는, 난 장선우의 편이다. 그의 몽골 원정 결과가 사뭇 기대된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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