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대 문인의 고민은 '평화' ― 서울국제문학포럼에 부쳐
문자를 통한 허구의 형상화를 가리키는 좁은 뜻의 문학이든 문자 활동 일반을 가리키는 넓은 뜻의 문학이든, 사람살이의 공간에서 문학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실용성에서도 정서적 소구의 힘에서도 문학은 새로운 형태의 여러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쓰기와 읽기는 인류 문명의 본질에 속하고, 그래서 인류가 존속하는 한 문학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문학포럼의 주제는 ‘평화를 위한 글쓰기’다. 그것은 이 포럼 조직자들이 현금의 가장 막중한 문학적 과제 하나를 평화의 성취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 이 포럼 참가자들이 자신들을 전통적 개념의 문인으로, 다시 말해 지식인으로서의 문인, 철학자로서의 문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실 루소나 롤랑이나 러셀 같은 그들의 선배는 평화주의의 어기찬 실천자였고, 평화는 진지한 문학이 비껴가지 않았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포럼의 소주제들을 보니, 참가자들이 평화로 가는 길을 여러 각도에서 탐색하리라는 것을 알겠다. 특히 제8세션의 주제 ‘평화와 차별: 성, 인종, 종교’와 제13세션의 주제 ‘빈곤과 세계의 계층화’는 자고 이래 평화를 가로막았던 장벽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인종(민족)이나 종교 사이의 불관용 탓에 일어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지난 세기 후반 이 행성을 피로 물들인 중동전쟁이나 북아일랜드 사태, 르완다 내전이나 유고슬라비아 내전 뒤에도 고삐 풀린 민족(종족)주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전쟁들은 종족이나 민족 사이의 전쟁인 것 못지않게 종교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다. 서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가,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과 성공회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가톨릭과 정교와 이슬람교가 증오의 굿판을 벌였다. 실상 우리가 21세기의 불길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문명의 충돌을 거론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종교 사이의 충돌이다.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주니어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를 중세 십자군전쟁에 비유함으로써, 스스럼없이 종교전쟁의 영웅을 자임했다. 전쟁의 가장 큰 연료가 이런 종교적 근본주의라면, 평화를 염원하는 문학인들이 이 불길한 열정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이 종교든 종교를 포함하는 이데올로기 일반이든, 그 아래 놓여 있는 것이 물질적 이해관계라는 것 또한 명확하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최강의 국가가 제 주적으로 테러리스트를 지목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학살과 파괴를 일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테러리즘의 뿌리는, 이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듯, 경제적 불평등이다. 1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오로지 더 많은, 더 자극적인 소비로 권태를 이겨내는 사람들이 한 행성에서 살아갈 때, 거기 평화가 깃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빈곤과 세계의 계층화’는 그러므로 평화로 가는 길의 핵심을 건드리는 소주제다.
소주제로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양심적 반전권, 다시 말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도 토론의 어느 구비에서 거론되기를 희망한다. 병역거부는 가장 구체적으로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그것이 문학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스타 앞에서 열광하는 팬들은 문학과 썩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러나 이번 포럼에 ‘출연’한다는 세계문학과 인문학계의 스타들을 한 번 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으로 나들이하는 것이 겸연쩍은 일은 아닐 것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佛 보드리야르/ "脫현대"주창 도발자
‘탈현대’ 사상을 주도했던 프랑스 철학자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등. 이들이 동일한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구성하지는 않았던 만큼 ‘탈현대’는 일종의 통속적인 설명 방식일 터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점에서 출발했지만,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근대적 계몽성’을 물었다. 안 그런 게 어디 있을까 마는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탈현대성의 ‘못 된’ 성격이다.
이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관점의 수호자가 보드리야르다. 그는 근대적 계몽성뿐 아니라 역사적 실재 자체의 힘을 다른 누구보다도 강하게 부인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설명하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아주 많이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이상하게도 결국은 우리가 실재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빠진다.
이를 위해 세운 개념의 첨탑이 가상 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술적인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던 80년대 초에 그는 실제의 90년대보다 더 극단적인 풍경을 그렸다. 영토는 더는 지도에 선행하지 않고, 그것 이후에 살아 남지도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며, 지도가 영토를 낳는다. 하이퍼(hyper) 리얼한 풍경이 휘황찬란하게 네온사인을 밝히는 순간이다. 실재로서의 세상도 벌써 이 하이퍼 리얼리티에 빠져서 사라졌는데도 네온사인은 그것이 아직 거기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디즈니랜드는 마치 그 안에만 동화세상이 존재하고 바깥은 현실세계인 것처럼 믿게 하지만, 사실은 벌써 바깥세상이 남김없이 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속이는 다른 가상, 골수 가상이라는 것!
정말 세상은 남김없이 가상이 되어버렸을까? 그가 지속적으로 던지는 이런 식의 극단적이고 보편적인 주장들은 과격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듯하다. 이 가상의 세계 안에서도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이 행동의 실천적 성격이 어떤 행동이든 그저 가상적인 환영(幻影)으로만 그치지 않게 만들 터이기 때문이다. 이 두 측면이 그의 말들의 복잡한 성격을 동시에 구성한다.
말과 행동에 관해서도 그는 극단적이다. 정보의 홍수는 결국은 세계에 대해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내용을 게우고 또 게워서 무의미만 생산한다. 더욱이 무엇이든 끝없이 생산하는 리얼한 세계에 아무리 ‘생산적인’ 방식으로 저항해도 결국은 이 생산성의 원칙이 승리하기에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해방’도 추구하지 말라고 그는 외친다. ‘해방’은 결국 생산성의 원리이며 실재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실재의 차원 이상으로 도발하고 더 큰 판돈을 거는 일뿐이다.
그렇다면 더 커지고 오래 살려는 권력에 대항하는 법은? 죽음을 통한 도발밖에 없는 셈이다. 그는 오늘도 이 상징적 희생제의, 도발적 푸닥거리를 신들린 듯 부추긴다. 자살 특공대, 한판 승? ‘효과’ 정도로 하자.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 英 마거릿 드래블/ 한중록 소재 소설 써
19세기 영국문단에 샬롯 브론테(‘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워더링 하이츠’) 자매가 있었다면, 20세기 영국에는 부커상 수상작가 A.S. 바이어트(‘천사와 벌레’와 ‘소유’)와 마거릿 드래블(‘레드 퀸’) 자매가 있다. 그 마거릿 드래블이 5월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한국에 온다.
드래블의 이번 방문은 그가 최근 우리 고전 ‘한중록’에 대한 소설 ‘레드 퀸’을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2000년 서울에 와서 우연히 영문판 한중록을 읽게 된 드래블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기구한 운명에 매료되어 영국으로 돌아간 후, 동양과 서양,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특이한 소설을 출간했다. 곧 한글판(문학사상사/전경자 역)이 나오는 이 소설에서 드래블은 18세기 한국의 정치상황과 사회상을 현대 영국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문제점들과 긴밀히 병치시키고 있다.
"어렸을 때 부자 사촌이 입고 온 빨간색 반투명 실크 스커트가 너무 갖고 싶었지요. 이후 저는 늘 붉은색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한국에서 붉다는 뜻의 ‘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라고 드래블 여사는 말한다. ‘레드 퀸’의 제1부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이 겪었던 비극적인 사건들을 회상한다.
제2부에는 영국인 주인공 바바라 할리웰 박사가 등장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러 가기 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한중록’ 영문판을 우편으로 받는다. 비행기에서 그 책을 읽게 된 바바라는 18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통해, 자신의 현 상황을 비추어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은 시공을 초월해 가족관계, 부자간의 갈등, 그리고 정치적 싸움에 대한 현대적 성찰로 보편화된다.
드래블의 문학세계는 여성주인공이 겪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통해 현대 영국사회와 개인 사이의 상관관계를 성찰하는 초기소설들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성의 운명을 그린 후기소설로 나누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레드 퀸’은 그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키고 있는 포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맷돌’ (1965), ‘폭포’(1969), ‘중간지대’ (180) 등이 전자에 속하고, ‘빛나는 길’(1987), ‘상아문’ (1991), ‘세븐 시스터즈‘(2002)같은 작품이 후기에 속한다.
전통적 가치들과 현재 욕망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드래블 소설은 감상적이지 않고, 아이러니와 위트, 그리고 영국식 유머로 가득 차 있다.
1939년 작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 둘째로 태어난 드래블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잠시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대역을 하기도 했고, 1985년에는 유명한 ‘옥스포드 문학사전’을 편집했으며, 존 라이스 상, 제임스 블랙상, E.M. 포스터상. CBE 상 등을 수상했다.
김성곤 서울대 영문과 교수 한국 현대영미소설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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