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의 최대 논란거리는 단연 동북아 균형자론이었다. 대통령의 균형자 발언 이후 일반인들은 그 취지와 목표에 공감하는 분위기인 반면 전문가들은 현실을 모르는 과잉의욕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논란의 핵심은 균형자라는 개념의 적절성과 현실적 역량 여부였고 이를 둘러싼 비판과 반박이 거듭되면서 정부의 설명도 조금씩 체계화되었고 갈등 역시 진정되는 국면이다. 그러나 이번 논란이 약이 되기 위해서는 동북아 균형자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으로 남기고 있는지 차분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균형자론 논란으로 한국 외교의 미래 전략을 놓고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타당하고 현실성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탈냉전 이후 동북아에 불안정성이 존재하고 있고 중·일 간 패권 다툼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한국이 평화와 협력의 동북아 질서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겠다는 지금 정부의 구상은, 균형자라는 개념의 옳고 그름과 실제 역량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외교의 비전임이 분명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이 100년 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새롭게 형성되는 동북아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강대국 간 갈등과 대결이 아닌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창출하는 데 적극 나서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동북아 균형자론은 의미 있는 고민으로 인정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논란을 통해 우리는 장차 백 년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외교안보전략을 구상하는 작업은 과거와 구별되면서도 지금 현재의 현실에 굳건히 토대해야 하고 동시에 미래의 이상을 지향하는 종합적 고려의 산물이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가 제시한 동북아 균형자론이 개념과 내용에서 복잡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고민이 반영된 탓이다.
지금의 동북아가 처한 객관적 환경은 냉전질서의 해체와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의 미완성이라는 유동적 상황이다. 탈냉전 이후 동북아 국가들의 경제적 상호의존성과 인적 교류가 심화되면서 이 지역의 평화와 협력이 증대되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아직 안정적인 신질서가 형성되지 못한 가운데 중·일 간 패권 경쟁 가능성이 대두되고 한·중·일 간 영토와 역사 문제를 놓고 갈등요인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이 논란 속에서도 한미동맹을 전제하고 경성 국력과 연성 국력을 동시에 고려할 수밖에 없음도 사실은 과거의 유산과 미래의 변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동북아시아의 과도기적 상황 때문이다.
이번 논란은 또한 우리에게 스스로의 힘을 평가하는 데 지나친 과대포장과 과도한 과소평가 모두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했다. 균형자론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점의 하나가 바로 한국이 과연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현실역량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나 한국 외교가 향후 균형자 역할을 통해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갖고자 하는 것을 두고 당장의 현실을 내세워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잘못이다.
당장의 현실을 돌아봐도 지금 한국이 동북아에서 나름의 발언권과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비하이다. 한국이 지금 동북아의 주도국가는 아니더라도 한국의 지지를 얻지 않고는 어떤 나라도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다. 힘을 통해 주변국을 강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타국이 무시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는 셈이다.
현실만을 직시하고 미래의 비전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면 일국의 대외전략과 국가목표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미래의 희망마저 포기하는 것 역시 잘못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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