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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몰가치론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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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몰가치론의 함정

입력
2005.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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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판단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팔꽃을 보고 나팔꽃인 줄을 아는 것이 사실판단이고, 나팔꽃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것이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의 오류는 사실 확인을 통해 객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다. 반면에 가치판단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사람마다 다르므로 똑같은 현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가치판단을 과학의 영역에서 배제하자는 실증주의가 현대과학을 지배하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몰가치론도 이에 해당한다.

실증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잘못된 주장이다. 모든 과학은 결국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사회과학자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자도 가치판단을 회피할 수 없다. 가치판단의 배제라는 주장 자체가 실은 현실 비판을 회피하겠다는 일종의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특정한 목적의식 내지 이념이며, 둘은 윤리의식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생의 목적이나 이념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다양함 덕분에 인간사회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목적의식이나 이념에 입각한 가치판단은 과학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리문제와 관련된 가치판단은 과학에서 배제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존재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기 때문이다. 학자가 비윤리적인(반인륜적인) 연구에 참여하면서 과학실증주의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과학자마다 가치관과 이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윤리의식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실증주의에 세뇌당하여 가치판단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고 주어진 목표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 주는 것만이 자기 일이라고 변명하면서 돈이나 권력이 시키는 일을 무엇이든 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스스로를 학상(學商)이나 학노(學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베버의 몰가치론이 주장한 것도, 교수가 강의실에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지 말자고 한 것이지 건전한 가치판단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윤리의 구체적 내용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다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윤리의 내용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요, 약자를 도우라는 것이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노력하라는 것이다. 즉, 이기심을 극복하고 모두 함께 잘 살기 위하여 노력하라는 말일 것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모든 세계종교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사실판단에서도 사람들은 종종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는 정보가 부족하거나 사고능력(정보 처리 능력)이 부족하여 사실을 잘못 파악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보다 학자가 더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편견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사실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왜곡하는 경우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부족하고, 현실은 복잡하며, 정보도 부족하여 사람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는 때가 많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학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자기 눈에 색안경을 쓴 줄도 모르고 흰 꽃을 빨간 꽃이라고 우긴다.

학자가 피해야 할 것은, 윤리적 판단으로서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부와 권세를 탐하여 편견이나 이해관계라는 색안경을 쓰고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일 것이다.

이근식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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