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가 형사재판에서 ‘검사의 피고인 신문 절차’를 폐지하기로 했던 당초 방침을 바꾼 것은 검찰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 논의과정에서도 반론이 적지 않았던 사안을 밀어붙이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검찰은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증거로 쓰지 못하게 하겠다는 방안과 함께 검사가 피고인을 추궁(신문)하는 절차를 폐지하는 것은 검찰 수사자체를 무력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검찰은 29일 이 같은 사개추위의 내부 방침 변경 사실에 일단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검 관계자는 "구두로 논의된 방침 변화가 명문화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며 "피고인 신문을 유지하는 데 더해 피고인이 신문조서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라도 독일처럼 적어도 법정에 조서를 들고나와 피고인을 신문할 수는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에 대해서도 나름의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다. 신문조서가 증거로 못 쓰이더라도 최소한 증거로 채택할지에 대한 판단은 사개추위 초안처럼 피고인의 의사에 따를 게 아니라 판사의 재량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여기에 검찰이 수사과정의 신뢰성 확보를 위해 중점 추진중인 검찰 진술의 녹음·녹화 자료를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근거를 명문화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배심·참심제 혼용재판이 사실상 미국식 배심 재판을 모델로 하고 있으면서도 유죄를 인정하면 형량을 깎아주는 유죄협상제도(플리바게닝), 자백한 공범에게 형을 면제하거나 낮춰주는 증언면책제도, 피고인이 법정에서 허위진술하면 처벌하는 사법방해죄 등의 미국 수사제도는 전혀 검토되지 않고 있다며 이 제도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개추위는 "당초 사법개혁위원회 논의에 포함돼 있지 않은 사항이라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일축하고 있다. 사개추위 관계자는 "진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뇌물 사건 등에서 유죄 입증이 어려워진다는 검찰 주장은 이해가 되나, 약간의 사회적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형사재판 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여야, 사개추위案 엇갈린 반응/ 우리당 "시대 흐름상 맞다" 한나라 "검찰 죽이기" 반대
대통령 자문 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가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 대해 여야의 반응은 대체로 엇갈렸다. 한나라당은 ‘검찰 죽이기’라며 반대했지만, 여당 의원들은 사개추위의 개혁 방향은 궁극적으로 맞다는 입장에 섰다.
열린우리당 제1정조위원장인 최용규 의원은 "사개추위가 내놓은 공판중심주의는 시대 흐름으로도 맞다"며 "검찰은 수사권 독립문제 등에서도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나누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법사위 간사인 최재천 의원도 "사개추위 안을 검찰개혁으로 보는 것 자체가 검찰의 편향적인 시각"이라며 "사개추위 안은 헌법에 근거한 재판구조 개혁인데 검찰이 검찰 수사권 약화로 호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우윤근 의원은 "그 동안 일방적으로 검사가 작성한 조서가 그대로 인정돼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가 어려웠는데 이번 개정안은 당사자가 대변할 수 있도록 방어권을 준다는 점에서 찬성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이원영 의원은 "지금 당장 검찰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시기 상조"라며 "구두변론을 우선으로 하고 검찰조서를 차 순위로 두는 절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신중론을 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강경했다. 법사위 한나라당 간사인 장윤석 의원은 "50년간 이어오던 우리의 형사사법 체계가 왜 일시에 부정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공판중심주의는 지금의 체계 속에도 반영이 되어 있고 운영을 지혜롭게 하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개추위의 입장은 국회 입법과정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영 의원은 "사개추위의 형소법 개정 추진은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대해 갖고 있는 원한과 복수심이 표현된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전여옥 대변인은 "검찰 수사권을 제한하는 것도 문제지만 권력에 대한 검찰의 견제를 무력화시켜 종이호랑이를 만들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며 "현 정권이 검찰에 대해 독립해 제대로 수사하라고 했지만 (검찰이) 정권을 상대로 칼을 겨누고 들어오니 이제 와서는 거꾸로 수사권를 빼앗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 大檢 검사 "이래서 문제…" 가상사례 제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마련한 형사소송 제도가 시행되면 재판이 어떻게 달라질까. 28일 대검의 한 검사가 검찰 내부통신망과 자신의 블로그(http://blog.naver.com /likyuk)에 올린 ‘김모양의 성폭행 무죄사건’이란 가상사례를 통해 예상되는 문제점을 짚어본다.
대기업 기획부서에 근무하던 김모(여)씨는 결혼을 앞둔 2008년 겨울 부서 회식을 마치고 "집도 가까우니 데려다 주겠다"는 부서장 이모씨의 권유에 이씨의 차에 올랐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이씨는 "커피나 한 잔 하자"며 김씨를 붙잡았고 차 안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순찰을 돌던 경비원 나모씨가 "차를 빼달라"고 요구하자 인근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늦은 시각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이씨는 갑자기 김씨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결국 완력으로 김씨를 성폭행한 뒤 "주변에 알려지면 당신에게도 안 좋을 테니 알아서 하라"며 사라졌다. 혼사를 망칠까 며칠을 고민하던 김씨는 결국 친구 전모씨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격분한 전씨는 설득 끝에 형사인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씨를 고소케 했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다 김씨와 대질 과정에서 결국 자백했고 사건은 검찰에 송치됐다. 홍모 검사는 구속된 이씨를 재조사하는 한편 피해자 김씨와 참고인 전씨를 불러 진술조서를 작성하고 이 과정을 녹음, 녹화한 뒤 이씨를 기소했다.
얼마 후 열린 배심형 재판에서 새로 바뀐 형사재판 제도에 따라 이씨의 변호인은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피고인 신문도 요청하지 않았다. 달라진 제도에 따라 검사는 피고인측이 요청하지 않으면 피고인을 신문도 할 수 없게 됐다.
변호인은 두 사람의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진짜 성폭행을 당했다면 왜 바로 경비원에게 알리지 않았나", "평소 김씨의 남자관계가 복잡했다", "아는 경찰관을 이용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등 피고인 주변에서 수집한 정황을 배심원단에게 집중 제시했다.
피고인을 신문할 수도 없고, 신문조서도 제시할 수 없게 된 검사는 증인석에 나와 "조사과정에서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진술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수사과정에 녹음·녹화한 이씨의 자백 장면도 이씨의 부인으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홍 검사는 결국 "이씨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며 법정 출석을 꺼리던 피해자 김씨를 증인으로 불러 사건 당시 상황을 재판부와 배심원단에 설명했다. 하지만 변호인은 오히려 "성폭행 당시 찢겨진 옷을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 버렸다고 했는데 당초 찢긴 사실 자체가 거짓 아니냐"며 김씨를 압박했고 재판부는 결국 범행의 뚜렷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검사는 이 같은 가상 사례를 통해 "사개추위가 추진하는 새 재판 시스템에서는 죄지은 피고인은 한 번도 추궁 당하지 않고 피해자만 배심원 앞에서 변호인의 추궁을 받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며 "수사기관이 밝힌 진실이 법정에서 조작·왜곡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대법 ‘조서 증거능력 부인’첫 판결/ 파기환송심서 무죄 선고
대법원이 지난해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첫 판결을 내린 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전주지법 형사2부(최복규 부장판사)는 29일 병원장과 공모해 교통사고 후유 장애진단서를 허위로 발급받아 보험금을 타낸 혐의로 기소된 주모(50)씨와 이모(43)씨 2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 중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와 검찰이 갈등을 빚고 있는 시점에서 나와 사개추위 개정안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과 공동피고인인 병원장, 참고인들이 법정에서 검찰조서 상의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어 피고인들의 검찰 조서는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 및 참고인들의 나머지 자술서 및 진술서에는 피고인들이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았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는 등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주씨 등은 1999년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뒤 병원장과 공모해 허위장애진단서를 발급받고 보험사 직원을 협박, 보험금 2,000여만원을 타낸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서 검찰 조서를 부인했음에도 1, 2심에서 모두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2월16일 피고인이 검사가 작성한 조서의 서명 날인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법정에서 검찰에서의 진술내용을 부인하면 조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며 기존의 판례를 깨고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최수학기자 s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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