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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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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입력
2005.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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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원 32만 명이 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나 5,000명이 넘는 전사자, 1만 명이 넘는 부상자, 그리고 그 가족과 유족들에게 베트남전 종전 30주년(4월 30일)을 맞는 느낌은 남다를 것이다. 이 역전의 용사들을 총지휘했던 채명신(80·蔡命新) 장군의 감회는 어떨까.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으로 4년 8개월 간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사선을 넘었던 예비역 육군중장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베트남참전동지회 회장이기도 한 그를 만나 이 시점에서의 베트남참전 의미와 당시 국군의 전투상황, 파병에 대한 개인적 평가 등을 들어보았다.

-베트남 종전 30주년을 맞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금년은 종전 30주년이기도 하지만 우리 전투부대가 파병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요즘 각 지방에서 부르는 데가 많아서 강의하러 다니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만나는 전우들마다 미군을 나가라고 하는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월남이 패망하기 직전과 똑같다고 걱정들입니다. 패권주의를 드러내는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더욱 공고해져야 합니다. 북한을 감시하는 장비는 90% 이상이 미군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미군이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날로 ‘안보의 섬’이 돼 버리고 말 겁니다."

-베트남 파병은 생존의 문제였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계획 때문에 파병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기자양반은 돈이 필요하다고 목숨 바치러 갈 수 있습니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국가존립이라는 더 큰 요인으로 파병이 결정된 겁니다. 미국이 지상군을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을 밝혔을 때 전문가인 내 눈에는 투입가능한 미군부대가 빤히 보였습니다. 하와이 해병사단 다음은 캘리포니아 북쪽 공습사단입니다. 이렇게 헤아린 부대들이 속속 파병됐는데 어느 순간 다음 차례는 주한미군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주한미군 2사단과 7사단 2개 사단 가운데 하나라도 빼면 어떻게 될까 상상이나 해 봤습니까. 당시 북한은 우리보다 GNP가 1.5배나 많고 군사력도 월등했는데 미군까지 사라진다면 북한이 가만 있겠습니까. 주한미군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라도 파병은 불가피했습니다."

-당시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여론이 세계적으로 거셌는데요.

"박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까지 파병을 반대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반전여론이 강했습니다. 베트남전에 미국이 개입한 것 자체가 사실 잘못이기 때문에 나도 전투병 파병은 반대했습니다. 베트남 문제가 점점 커지던 1964년 4월인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박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전투부대를 보내면 어떨까’ 하고 묻길래 ‘베트콩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없습니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담배를 찾는데 극도로 흥분해서 손에 담배를 제대로 끼우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게릴라전은 독립쟁취 같은 뚜렷한 목표의식과 인간적인 존경을 받는 카리스마와 리더십, 은신과 보급이 가능한 지리적 환경 등이 필요한데 호찌민 부대가 바로 그런 최고의 조건을 갖췄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싸움에서 지더라도 미국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는 갈 수밖에 없다고 했지요."

-우리 군인들이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작전의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의심가는 지역을 수색하고 격멸하는 미국식 전술로는 게릴라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는 연대급 부대 공격에도 48시간 이상 견딜 수 있는 중대 단위의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습니다. 작전지역 마을마다 한두 개씩 전술기지를 구축한 다음에 지속적인 수색정찰과 매복작전으로 적과 주민을 분리하는 계략을 만들었습니다. 평소에는 마을로 내려가 노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침도 놔주고 식량도 나눠주면서 선무공작을 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점차 마음을 열고 나중에는 베트콩이 파놓은 함정을 알려줄 정도로 협조해 오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소규모 기지전술을 반신반의했던 미군들도 청룡부대의 중대기지가 짜빈동 마을에서 2개 연대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는 우리 전술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66년 5월에는 런던타임스 신문이 베트남전을 한국군에게 맡겼다면 전쟁을 진작에 끝냈을 것이라고 극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미군들조차 베트남에서 밤에 맘놓고 다닐 수 있는 지역은 한국군 주둔지밖에 없다고들 했습니다."

-미군과의 작전협조는 잘 됐습니까.

"처음에는 작전지휘권 문제로 부딪쳤습니다. 미군측에서 한국군 병력이 2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미군의 통제를 받으라고 강요한 겁니다. 전술적으로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 자체가 잘못됐고 잘못된 군사전략에 우리가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게 내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월미군사령관인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남부지역을 지휘하는 라슨 장군에게 미국이 벌이는 이 전쟁은 순수한 의미의 군사전쟁이 아니라 정치전쟁이라고 설득했습니다.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면 우리는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을 테고 미군도 전쟁을 청부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지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가질 때만 이 전쟁의 성격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로 설득해 우리의 입장을 관철했고, 그 뒤로 협조체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전과를 들여다 보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군은 전쟁 내내 M16 자동소총을 썼지만 우리는 한참동안 M1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한국군은 아군 한 명이 전사할 때 적 열두세 명을 사살하고 사살자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베트남에 주둔하는 8년 동안 4만 명 이상을 사살했는데 총이나 수류탄도 대략 2만 정을 확보한 겁니다. 미군의 무기회수 비율은 우리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남베트남군은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베트콩들은 동료가 쓰러지면 시체보다 총을 먼저 챙길 정도로 무기를 생명처럼 여겼는데 이 정도로 많은 무기를 노획한 것은 우리 군이 얼마나 알뜰하게 베트콩만 골라서 공격했는지를 반대로 증명해주는 겁니다. 양민학살 주장은 참전 의미를 훼손하려는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합니다."

-베트남전으로 우리가 얻은 이득은 무엇입니까.

"우선 파병 전에는 우리나라를 손톱 밑의 때 정도로 보던 국제사회가 차츰 우리를 인정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우리 군의 전과가 속속 알려지면서 세계금융기구에서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차관 140억 달러를 선뜻 내줬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었습니다. 경제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현대건설이나 한진이 한 몫 잡은 것도 다 베트남전 특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현대건설이 처음 깜란만으로 진출한 것도 사실은 우리 군이 쌓은 신뢰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깜란지역에는 미 4사단이 들어올 계획이었는데 한국군이 베트콩을 확실히 지켜준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우리 백마부대가 들어가게 됐고 현대건설도 그 덕을 본 겁니다. 물론 국민들 모두가 땀흘려 일궈낸 기적이지만 선봉은 군인이 섰다고 봅니다."

-베트남전은 고엽제라는 피해를 남기기도 했는데요.

"우리도 고엽제 후유증이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에서도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 지방언론에서 지적하는 바람에 문제가 불거진 걸로 압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부터 참전동지회에서 후유의증 환자를 후유증으로 해 달라며 많이 싸웠습니다. 신청은 훨씬 많았는데 지금 현재 대략 1만 2,000명이 후유증 판정을 받았고 3만 명이 의증 판정을 받은 걸로 압니다. 후유의증을 후유증으로 올려 유공자 혜택을 받게 해 주는 게 참전동지회의 최대 현안입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 채명신 장군은 누구/ 소규모 기지 작전으로 베트남전서 명성

채명신 장군은 한국전쟁에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최초의 해외 파병부대인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을 지낸 백전노장의 영원한 군인이다. 팔순의 고령에도 베트남전참전동지회와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육군작전참모부장이던 1965년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사령관을 맡은 4년 8개월 간 주월미군으로부터 독자적인 작전권을 얻어내고 중대급의 소규모 기지 작전으로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는 명장의 평가를 받았다. 이세호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1947년 월남했고 육사 5기로 군문에 들어섰다. 5·16 쿠데타 당시에는 5사단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동대문까지 진출해 쿠데타를 지원했다. 베트남에서 귀국 후 1972년 2군사령관(중장)으로 전역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정계입문 권유도 있었지만 거절하고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1981년 은퇴한 후 미 하버드대 등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다 1988년 귀국했다. 육사 후배이자 베트남 참전동지이기도 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참군인의 길을 포기한 정치군인’ 이라며 소원하게 지내고 있다.

김정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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