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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종전 30년/ 抗佛·抗美 승리 주역 보 응우옌 잡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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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종전 30년/ 抗佛·抗美 승리 주역 보 응우옌 잡 인터뷰

입력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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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 그는 이제 94세다. 그는 베트남의 항불(抗佛)-항미(抗美)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한국의 나이든 세대도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보구엔 지압’이나 ‘武元甲’으로 불렸다. 역사가들은 그를 빼고는 베트남 전쟁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로 불리는 고 호찌민 주석 다음으로 ‘살아 있는 전쟁 영웅’ 잡 장군을 존경한다. ‘베트남의 심장’ ‘레드(Red) 나폴레옹’처럼 따라 다니는 별명도 많다. 한국일보는 베트남 종전 30주년을 맞아 감회가 남다를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19일 하노이의 호왕지우 거리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그의 첫 모습이 무척 궁금했다. 잡 장군은 베트남 특유의 국방색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160㎝ 남짓한 작은 키에 성성한 백발을 정갈하게 뒤로 빗어 넘긴 모습이다. 어깨 견장에 달린 별 네 개와 군복만 아니라면 곱게 늙은 할머니 같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인들이 그를 왜 ‘눈 덮인 화산’으로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시종 냉철하고 엄숙했다. 아흔이 넘었어도 눈매는 매서웠고, 목소리의 울림도 컸다.

질문을 받으면 기자의 생각이 어떤지 공격적으로 묻고는 또렷또렷 답변을 이어갔다. 살짝 떨리는 입과 얼굴의 검버섯, 힘줄만 남은 마른 손만이 그의 나이를 말해 주었다.

_4월 30일이면 베트남 종전 30주년이다. 종전에 대한 감회를 말해달라.

"베트남의 종전 30주년을 축하해 줘서 고맙다. 우리는 미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프랑스와 벌인 디엔 비앤 푸 전투(1954년)는 전세계 식민지 국가의 승리였다. 미국과의 전쟁은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1971년 미군 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많은 양민들이 죽었다." (이 시기 미군은 북베트남을 휴전협상에 끌어들이기 위해 호찌민 루트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한편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장을 확대시켰다.)

_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베트남은 하나가 됐고 호찌민 주석도 ‘베트남은 하나다. 베트남 민족도 하나다’라고 했다. 베트남 속담에 ‘강물이 말라도, 산이 닳아 없어져도 정신과 진리는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베트남인에게 통일은 진리였으며, 숱한 고통 속에서 지켜낸 이 믿음이 마침내 통일을 이뤄냈다."

_수많은 한국군도 당신의 부하들과 싸웠다. 한국군의 참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이 전쟁의 주범이며 한국은 거기에 참여해 전쟁을 했다. 우리는 미국의 주장을 박정희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이 베트남 양민을 죽인 것을 우리는 다 기억하고 있다. 한국인이 베트남에 오면 그런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나 한국이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와서 사죄하고, 한국 국민 중에 미국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도 읽었다."

_양국 간 과거사의 정리 문제와 앞으로의 양국 관계에 대한 생각은.

"베트남과 한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외세의 침략을 당한 공통된 경험이 있다. 우리는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다만 한국인들은 과거 죄악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가지고 표현해야 한다. 한국군은 주로 베트남 남쪽에서 악행을 했다. 우리는 한국군의 잔학성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이 부분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그런 태도로 임하는 것을 봤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지금 양국 관계는 매우 좋다. 지금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협력은 증진되고 있다. 과거는 지울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해 같이 나아가자." (그는 21일 참전군인들의 종전 기념식에 참석해 가난을 이겨내고 선진국을 따라 잡자며 ‘부강한 나라’를 목표로 제시하는 연설을 했다.)

_한반도는 이제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다. 남북한 양쪽에 조언을 해 달라.

"내가 오래 전 북한을 방문해 평양에서 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김 주석이 ‘장군,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남북한의 관계는 좋아지는 것 같다. 서로 방문해 인사를 하고 발전을 위한 길을 닦고 있는데, 이런 것은 정말 좋다. 그런 과정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렇게 계속 해야 한다."

_구체적으로 남북한에 주문한다면.

"내가 알기로는 남북한 모두 통일을 원하는 마음은 같다. 의견을 모으고 필요한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눠가기를 바란다. 옛말에 ‘백성의 마음은 곧 하늘이다’라고 했다. 남쪽이 통일을 원하고, 북쪽도 통일을 원한다면 어느날에는 반드시 통일이 될 것이다. 통일된 날은 남북 모두의 승리의 날이다. 그리 하는 것이 아시아와 전세계가 우정과 화해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남과 북이 장차 이룩할 통일을 미리 축하한다."

_최근 일본의 과거사 왜곡이 동아시아에 긴장이 고조시키고 있다.

"모든 나라마다 자기 주장이 있다. 제 나름대로 다른 의견들이 있으나 의견 차이를 좁혀서 발전의 계기를 삼았으면 한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예견하는 듯 거듭해 "통일을 미리 축하한다"며 기자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잡 장군의 인터뷰는 신청 후 7일 만에 이뤄졌다. 신청을 한 지 6일 만에 "가능할 것 같다"는 답신이 왔고, 약속 시간은 당일 날 오전에야 통보됐다. 잡 장군을 보좌하는 현역 대령은 사전에 "건강이 좋지 않아 접견을 삼가고 있다"며 "인사 드리는 정도에서…" 라고 조건을 걸었다. 기자가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불과 7시간 전이었다.

하노이=이태규기자 tglee@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 잡 장군은 누구/ 디엔 비앤 푸 전투·구정공세 이끈 ‘세기의 전술가’

보 응우옌 잡 장군은 ‘국부(國父)’로 불리는 호찌민과 함께 일생을 베트남 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인물이다. 베트남 고유의 인민전쟁 사상이 호찌민에 의해 채택되었다면, 이를 군사적으로 완성하고 전쟁에 적용한 이는 잡 장군이다.

‘세기의 전술가’라는 그의 명성은 1954년 디엔 비앤 푸 전투가 계기였다. 프랑스가 ‘철의 요새’로 자처한 이곳은 그가 이끄는 북베트남군의 공격으로 56일 만에 함락된다. 잡 장군은 300㎞ 떨어진 홍강의 델타 지역에서 자전거와 나룻배로 보급을 하고, 대포를 사람의 힘으로 끌며 산정에 올라갔다. 한 사람이 가지고 간 보급품의 10분의 9는 행군 도중 소비됐으며, 한 전사는 밧줄로 견인하던 야포가 산 아래로 미끌어지자 몸을 바퀴 밑에 던지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군 5,000여명이 죽고 생존자 1만여명은 백기를 들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군대를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낸 대승리였다. 이후 프랑스는 제네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물러갔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1968년 1월 ‘구정공세(Tet Offensive)’로 다시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는 전 병력을 동원해 전후방에서 동시에 공격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까지 일시점령했다. 중부 케산에선 불패신화의 미 해병대를 기습포위해 11일 간 대혈전을 벌였다. 미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11만여 톤의 포탄을 쏟아부었지만 해병대원 2,200여명을 잃었다. ‘제2의 디엔 비앤 푸’로 불리는 구정공세가 미 전역에 TV로 중계되면서 ‘승리하고 있다’는 미 정부의 거짓은 탄로가 났다. 결국 국론이 양분된 미국은 내부에서 먼저 패배하게 된다.

그의 전략은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병행하며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수십년 간의 장기전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같은 전략으로 북베트남은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겼다.

화려한 전공과 달리 잡 장군의 개인사는 여느 베트남인처럼 불행하다. 그는 1912년 꽝빈성에서 태어나 하노이대학을 중퇴한 뒤 잠시 역사과목 교사를 했다. 당시 손자(孫子)와 나폴레옹에 심취한 것이 후일 전략 전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1945년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인민공화국의 군 책임자가 되지만, 가족은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모두 죽는 불행을 겪는다. 첫 부인 꽝타이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운 죄로 수감 중 사망했고 아버지와 여동생, 매제까지 프랑스 비밀경찰에 처형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무자비하고 강압적이며 독단적이란 평가도 받는다. 베트남전 말기 그는 건강악화로 일상적인 군 지휘권을 후진에 이양했다.

1978년 캄보디아전에 대한 전략을 놓고 공산당 정치국과 충돌한 뒤에 정치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는 전쟁영웅으로 존경받으며, 베트남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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