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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역사용어 바로 쓰기

입력
2005.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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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왔다. 이토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내용의 5개 조문으로 된 문서를 내놓으며 체결을 강요했다. 이토가 지은 문서 이름은 ‘한일협상’이었다. 유생들은 강제체결에 분노하며 이 조약을 ‘억지 늑(勒)’을 쓴 ‘을사늑약’이라고 불렀다. 이를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이름 붙인 건 이완용이다. 조선을 ‘보호’한다는 일본의 미명(美名)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였다. 광복 후 이 용어가 국어사전과 역사 책에 그대로 실려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 일제가 만든 왜곡된 역사용어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다. 적극적인 독립의 의미를 지닌 ‘8·15광복’을 피동적인 의미인 ‘8·15해방’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조선백자’를 ‘이조백자’라고 하고, ‘경술국치’를 ‘한일합방’이라고 쓴다. ‘일제 강점기’보다 ‘일제가 주인공인 시대’로 해석되는 ‘일제시대’라는 용어가 더 자주 쓰인다. 주체가 불분명한 ‘창씨 개명’을 ‘일본식 성명 강요’로, 서구의 문호개방 압력을 합리화할 우려가 있는 ‘쇄국정책’을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교과서 용어를 수정했지만 다른 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해방 6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이틀간 ‘독립운동사 용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연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주제발표문에서 "일제가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관학자들을 동원해 만든 각종 식민지 용어가 아직도 쓰이는 것은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 대신 ‘안중근 의거’가 적절하며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헤이그 밀사는 헤이그 특사, 의병토벌은 의병학살, 대동아전쟁은 태평양전쟁, 정신대는 일본군 강제위안부 등이 올바른 용어라고 주장한다.

■ 동양에서 치국의 원칙으로 삼았던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은 사물의 실제와 그 이름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 시각으로 명명하는 것도 정명사상과 다르지 않다. 국회가 그저께 국사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여야 합의로 가결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국사교육 강화에는 역사용어 바로 쓰기가 포함돼야 마땅하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28일자 지평선 내용 중 쌀 한말은 에쎄(2,500원) 6갑에 해당하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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