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물밑에서 논의되던 지방행정구역체계 개편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행정자치부, 정부혁신위원회는 28일 오전 여야정 협의회를 열어 개편의 기본원칙과 방향에 합의했다.
여야정이 이날 합의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시도-시군구-읍면동’ 등 3단계로 된 현행 행정계층을 단순화하자는 것과 시간을 갖고 충분히 논의한 뒤 2010년 지방선거부터 새로운 체계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현행 행정구역이 기능의 중첩과 의사전달 왜곡 등의 비효율성을 안고 있는 만큼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현재 여야가 구상중인 안은 외견상 비슷하다. 도(道)를 포함한 현행 광역자치단체의 단계적 폐지, 전국 234개 시군구 통폐합과 인구 100만명 이하의 광역도시 60~70개로의 재편, 그리고 그 산하에 실무행정단위 구성 등이다.
열린우리당은 도(道)를 없애고 전국을 1개의 특별시와 60여개 광역도시로 재편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입장이고, 한나라당도 도(道)를 폐지하고 인구 30만~100만명의 광역도시 60∼70개로 재편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요약하면 여야 모두 시도-시군구-읍면동으로 구성된 3단계 행정계층을 광역자치단체-실무행정단위의 2단계로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각각 정책기획단, 태스크포스를 가동해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간단치 않은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선 행정구역 개편 문제가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선거구 조정과 맞물려 있다는 게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만 ‘시·군 통합방안’, ‘특례시 또는 지정시 도입’, ‘광역시의 도 편입’, ‘시군구의 광역단위 통폐합’ 등 수많은 개편방안이 제시됐지만 정작 이를 거부한 쪽은 정치권이었다. 1996년 문민정부가 도(道) 폐지를 추진했지만 결국은 80여개 시·군을 도농통합시 40여개로 축소한 게 고작이다. 지역구도 속에서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정치권의 욕심 때문이었다.
더욱이 조만간 여야간 이견이 큰 중대선거구제와 자치경찰제 도입, 기초단체장 정당 공천 배제, 단체장 3연임 제한 해제 등에 대한 논란이 본격화하고, 내년 하반기부터는 개헌 문제가 공론화할 전망이어서 행정구역 개편론이 끼어 들 틈새가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없지 않다.
정부 주무부처인 행자부가 정치권의 행정구역 개편 움직임에 선뜻 호응하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행자부측은 국회 답변에서 "전국을 단층화된 70여개의 자치단체로 개편할 경우 규모의 경제 확보, 행정기능 중첩 해소 등의 장점이 있지만 지역특성에 맞는 행정 수행 곤란, 중앙정부의 업무 과부하 등의 단점도 예상된다"며 "행정구역 개편이 더욱 효율적인지 여부는 단정하기 곤란하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지방정부와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도 극복 과제다. 서울시는 최근 "전국을 50∼60개의 행정구역으로 세분화하면 자치정부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은 중앙정부에 종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과 행정개혁시민연합도 성명을 내고 "전국을 수십개의 광역단위로 나누는 식의 행정체계 개편은 분권과 자치를 본질로 하는 지방자치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따라 여야는 학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중립적인 기구에 개편안을 마련토록 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지자체 반응 엇갈려/ "지자체 약화…중앙집권화" "지역구도 탈피에 긍정적"
정치권의 행정구역 재편 움직임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지역구도 탈피 등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시는 반대 분위기가 우세했다. 시 고위관계자는 "광역단체 아래 기초자치단체를 두는 일명 ‘이층제’를 개선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전국을 수십개의 광역단체로 재편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잘게 쪼개진 지자체들은 결국 힘이 약해지고 중앙집권화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행정구역 개편이 쉽게 될 수 있느냐며 반신반의하는 분위기. 1995년 국회의원 시절 행정구역 개편 필요성을 가장 먼저 주장했던 손학규 경기지사는 "지방 분권이 이뤄지지 않은 마당에 행정구역 개편만 추진할 경우 혼란을 초래하거나 껍데기 개편이 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도계간 통합이 예상되는 기초자치단체들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전북 익산시와 통합이 예상되는 충남 논산·계룡시 및 충북 영동·옥천군과 개편이 예상되는 충남 금산군은 "지역 정서와도 맞지 않아 통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충남도 관계자도 "면 단위 행정구역 조정도 주민 이해가 얽혀 어려운 형편인데 수백년 동안 내려온 주민 정서를 인위적으로 개편하는 게 쉽겠느냐"고 말했다. 충북도도 "명분은 좋지만 개편 과정에서의 혼란과 이후의 행정 낭비 등을 고려할 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지역구도 탈피에 도움이 되고 행정의 능률성도 높일 것이라며 환영했다. 충북 청원군 관계자는 "일선 시·군은 직원이 크게 줄었는데 도청은 IMF 이전보다 기구와 직원이 늘어나는 등의 기현상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주시는 "청주가 광역시가 되면 지역 균형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다"며 "과거에 나왔던 시·도 통합론에 비하면 훨씬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전남도의 한 중견 간부는 "일제 때 통제 수단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3단계 행정계층은 현실에 맞게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며 "무엇보다 공무원들의 행정 서비스가 업그레이드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행정구역 통폐합이 지역공동체의 동질성을 무시한 채 인위적이고 획일적으로 이뤄질 경우 오히려 주민갈등은 물론 지방자치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국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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