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인터뷰/ 한국원자력硏소장 퇴임 장인순 박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인터뷰/ 한국원자력硏소장 퇴임 장인순 박사

입력
2005.04.29 00:00
0 0

1999년부터 6년간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개발의 중심인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낸 장인순(65) 박사가 28일 퇴임했다. 그는 재임 중 과학자 출신 기관장답게 해수 담수용 일체형 원자로(SMART), 양성자가속기 사업 등 굵직한 원자력 대형기술 개발을 지휘했다. 아울러 지난해 우라늄 분리실험 조사차 방문했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전문가적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설득해 위기를 넘기는데도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원자력을 지배하는 나라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주제의 이임사를 쓰고 있던 장 소장을 27일 대전 연구소 내 집무실에서 만났다.

-1979년 원자력연구소에 들어와 무려 27년을 함께 하셨습니다. 이임사를 준비하시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까만 머리로 이 곳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흰 머리를 갖고 나가려니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 두 동에 불과하던 연구소 건물은 54동으로 늘었고 23억원이었던 예산은 2,300억원을 넘어섰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 때 시작했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가 원자력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을 보면 앞으로도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외교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편입니다.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동안 저는 가족과 휴가를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80년대에는 휴일도 없이 오전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기 일쑤였고 일주일 근무 시간이 100시간이 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참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우리 뿐 아니라 전 국민이 그렇게 일했는데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휴일도 없이 연구에 몰두하게 한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우리나라 국민은 ‘에너지 자립’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라는 말을 씁니다. 에너지가 너무 부족해 자립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너지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원자력밖에 없다는 믿음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편이지만 안전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요.

"그보다 ‘필요-불필요’에 관한 논의가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인간이 하는 일을 좋아서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나눈다면 원자력은 마지막에 속합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매년 3,000명이 죽는다고 자동차 운전을 전면 금지시키는 것이 가능할까요. 기름값이 배럴 당 100달러를 넘는 것은 시간 문제고 50년만 지나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석유를 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같이 인적 자원만 많은 나라는 ‘두뇌’에 의존해야 하는데 원자력이 바로 ‘두뇌 에너지’입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원자력 에너지 비율을 70%까지 올려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아닌, 후손을 위해서요."

-원자력의 안전성은 보장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원자력 관련 연구가 가장 많이 진행되는 이 곳에서 3,000명이 넘는 직원이 매일같이 일하고 있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지요. 우리도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똑 같은 인간입니다. 원자력 뿐 아니라 모든 연구는 안전이 최우선으로 고려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을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라늄이 워낙 희귀해서 앞으로 50년 후면 바닥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원자력에 쓸 수 있는 자원은 무궁무진합니다. 바닷물 속에 상당량 녹아있는 우라늄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됐습니다. 경제성이 맞지 않아 지금은 쓰지 않고 있을 뿐이죠. 우라늄 외에 ‘토륨’이라는 원소도 원자력 발전에 사용 가능하고 핵연료 재처리 등 재활용까지 염두에 둔다면 원자력 에너지 원료 걱정은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접어두어도 됩니다."

-재임 기간 중 우라늄 분리 실험에 관한 IAEA 사찰이 세계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잘 대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IAEA 사찰은 3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이뤄져 왔고 당시 실험 내용도 추가의정서 발효에 따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보고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사회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위치와 분단 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북핵 등에 대한 외교적 이해관계 등이 얽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저를 인터뷰한 한 일본 기자는 ‘누가 시켜서 했냐’고 다그치더군요. 정부 차원에서 무기를 위한 우라늄 농축 실험을 했다고 의심했던 겁니다. 그래서 ‘과학적 실험은 내가 모두 책임을 진다’고 답했습니다. 제가 원자력 전문가였기에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실험이었다는 설명이 조금 더 설득력을 지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실험이 과학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나요.

"우리나라에서 원자력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평생 핵연료 생산 및 농축 기술의 국산화를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핵연료 연구는 80년대 끝났는데 농축 기술은 비핵화 선언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이었지요. 연구자들 모두 비슷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기술이 있는데 ‘정말 가능할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레이저를 이용한 우라늄 분리(AVLIS)는 상당히 어려운 최첨단 기술입니다. 모순되게도 지난해 사찰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원자력 수준을 해외에 알리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 후로 공동연구 제의가 눈에 띄게 늘었어요."

-일본은 농축은 물론 재처리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원자력 연구를 제한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과학자들에게서 호기심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과학적 동기까지 꺾이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80년대에는 외부의 압력 때문에 원자력연구소 명칭을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원자력계의 ‘창씨개명과 같은 질곡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원자력 발전을 위해 무엇이 우선돼야 하겠습니까.

"일본 원자력의 대부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프랑스는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 꼽힙니다. 원자력에 국가 원수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뜻이지요. 올해 과학의 날에는 정부에서 저에게 최고 훈장을 내렸습니다. 정부가 이제 원자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북한 핵 문제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데, 전문가가 보시기에 북한의 핵 관련 기술은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핵 연료 재처리 기술은 60년 전에 완성된 것으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농축 기술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보나 상당 수준 발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핵실험은 하지 않았거나, 하더라도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듯 하고요. 어쨌든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이 성공한다는 전제 아래 모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퇴임 후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요.

"초등학교 때 수학자가 꿈이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수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셔서 충격을 받고 포기했습니다. 언제나 다시 태어나면 수학자가 되리라고 생각해왔어요. 퇴임 후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너희 미적분을 왜 배우냐’고 했더니 아무도 답을 못하더군요. 요즘 학생들이 문제 푸는 기계가 되고 있어요. 이 아이들에게 ‘수학다운 수학’을 가르쳐보고 싶습니다."

대전=김신영기자 ddalgi@hk.co.kr

사진 조영호기자

■ 장인순 박사는 누구

장 소장이 보유한 시집은 700권을 넘는다. 연구소를 찾는 귀빈들에게도 ‘달리 줄 것이 없다’며 애독하는 시를 모아 선물할 정도로 시와 문학을 사랑한다. "과학자는 자연과 신의 섭리를 밝혀야 하므로 순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많은 독서를 통해 적절한 비유를 섞어가며 원자력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달변가로 통한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장 소장은 1970년대 한국을 찾은 재미 과학자들을 만나 원자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미래 기술’이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같은 분야에서 일했다.

유학 후 돌아와 대덕 연구단지 조성에서부터 성장까지를 지켜본 산 증인으로 꼽힌다. 재임 기간 중 기술출자 방식의 정부 출연 연구소 기업 모델로 일컬어지는 ‘썬 바이오텍’ 설립, 대덕 연구단지 내 ‘원자력 밸리’ 조성사업 추진 등 원자력 기술의 산업화에도 기여했다는 평이다.

1958년 전남 여수고 졸

1964년 고려대 화학과 졸(66년 동 대학 석사)

1976년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이학 박사

1977년 미국 아이오와대 화학과 박사 후 연구원

1979년 한국원자력연구소 핵화공연구실장 및

화공재료연구부장

1994년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

1999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2000년~ IAEA 원자력에너지자문위원

2003년~ 원자력국제협력재단 이사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