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분단국가의 한 ‘풋내기 국립대 조교수’가 일본 유학을 떠난다. 마르크스는커녕 러시아어 사전조차 금서였던 시절, 카프문학 연구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겁 없이(김기림 ‘바다와 나비’)’ 현해탄을 건넜던 그가 원로 국문학자이자, 여전히 열정적인 현장비평가인 김윤식(69)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가 40년 지적 편력의 구비들을 회고하며 쓴 책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솔출판사)을 펴냈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도쿄대 서고며 와세다대학 도서관, 일본근대문학관을 다니며 서고문이 닫히는 시간까지 끼니도 잊고 대학노트에 베꼈다고 한다. "이런 생활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 말대로 갈 데 없는 묘지기. 시체지기에 더도 덜도 아닌 것. 왜냐면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현실이었으니까."(65쪽)
그에게 현실은 이중의 금기였다. 조국 한반도가 만든 금기와 이방인으로서의 금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헤겔의 목소리도,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할 길의 지도를 하늘의 별빛이 비추어주던 시대는 복되도다!’던 헝가리 청년(루카치 ‘소설의 이론’)의 외침도 도서관 바깥에는 없었다고 했다.
그는 도서관이 문을 닫는 일요일 우에노 공원 국립서양미술관의 ‘로댕’ 조각 등에서 위안받던 순간들을 회고하고, 훗날 그 예술과 학문의 체험이 얼마나 안전한 도피처였던가를, 소설 ‘광장’의 이명준을 통해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의 ‘무한 자유’를 읽고 지적 고공비행을 체험했던 그 젊은 철학도(이명준)가 맞닥뜨린 냉전 조국 한반도의 ‘예리한 금기’에 대한 공감이다. "그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 (매개항으로서의, 숨구멍으로서의 예술이 없이) 그 시대의 수압을 견디려 했"고 "그것이 비극이었다"(81쪽)고 반추한다.
그는 지난해 초 도쿄를 다시 찾았고, 유학시절 그에게 가장 큰 위로였던 ‘사반느’라는 화가의 ‘가난한 어부’ 앞에 섰다. "(당시의) 절망을 사르트르도, 헤겔도 구원 못했던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머리에 흰 서리를 인 그가 시방 삼십사 년 만에 ‘가난한 어부’앞에 서 있소. 이 가난한 어부보다도 훨씬 가난한 모습으로 말이오."(89쪽)
그는 책에서 일본 비평계의 석학 고바야시 히데오, 일본민예관의 창설자이자 ‘조선과 그 예술’의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진면목을 성찰하는 등 현해탄을 마주하고 근대화라는 숙제를 풀어나간 두 나라의 문학적 예술적 관계를 학자적 체험을 통해 전한다.
해방 전 ‘현해탄 콤플렉스’에 항전했던 이상과 정지용과 윤동주가 있었고, ‘네 칼로 너를 치리라’던 임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고, 오늘의 젊은 유학도들이 있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대체 문학이란 무엇인가. 군도 알다시피 문학이란 없다. 문학적인 것이 있을 따름. 더 정확히는 문학적인 것의 ‘현상’이 있을 터이다. 성패가 거기 끼어들지 못함은 이런 연유에서다.… 성패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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