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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30년 베트남 리포트/ 한국군 참전지역을 가다 - 무너진 건물속 '맹호부대'마크 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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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30년 베트남 리포트/ 한국군 참전지역을 가다 - 무너진 건물속 '맹호부대'마크 선명

입력
2005.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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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주둔지를 가기 전 하노이에서 만난 교민들은 하나같이 당부의 말을 했다. 베트남 사람들도 잊고 지내는데 공연히 아문 상처를 덧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름아닌 양민학살 문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를 뒤로 한 채 다낭에 도착해 한국군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한국군 전투부대는 중부 지역 다낭-호이안(청룡부대) 꾸이년(맹호부대) 닌호아-나짱(백마부대)에서 주로 작전을 펼쳤다.

주둔지를 찾아가는 길은 예상외로 어려웠다. 이곳의 지난 30년은 자연과 사람까지 모든 것을 바꿔놓은 듯했다. 간신히 주둔지에서 청년시절을 보낸 현지인을 만나 간 곳은 다낭에서 30㎞떨어진 호이안 외곽지대였다.

그러나 이곳에 주둔했던 청룡부대(해병대) 본부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부대 정문부터 200m에 걸쳐 박격포가 설치돼 있었다고 현지인이 가리킨 곳은 2차선 길과 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주민들이 청룡을 ‘딴롱’으로 기억하고, 도로명을 ‘따이한 거리’라고 붙이는 등 언어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해병대원으로 파월 경험이 있는 정용산 다낭대학 교수는 "이달 초 찾아온 당시의 ‘고참’들과 찾아간 옛 부대는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고 허탈해 했다.

‘밀림의 왕자’ 맹호부대(수도사단)는 후방인 푸깟과 꾸이년에 주둔했다. 역시 이곳의 모든 것도 시간 속에 덮였다. 꾸이년의 맹호사령부는 호아동이란 이름의 마을로 바뀌었고, 장병들이 만든 팔각정에선 지금 필름을 팔고 있다. 마을 입구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에 부대마크 ‘포효하는 맹호’는 선명했다.

파병 한국군은 현지 주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학교와 교량을 만들어주면서 전쟁을 했다. 디안에 주둔한 비둘기 부대(공병대)가 건설한 호찌민 외곽 환상도로는 지금도 제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젊은이들이 피를 뿌린 베트남은 아픈 기억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있었다.

한국여행사들이 주둔지를 여행 코스로 개발해 참전군인들을 끌고 있지만 현지에 온 이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호이안의 내륙쪽에 위치한 딩방의 딩엉 지역에선 교민들이 말한 ‘학살’의 증언이 나왔다. 1968년 2월 12일 디엔안 지역 주민 74명을 비롯해 인근 주민 118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지방정부는 위령비까지 세워 비문에 "남조선군에 의해 74명의 민간인이 참살당했다"는 설명과 사망자 이름을 새겨 놓았다. 두 달 된 아기를 포함해 열 살 이하가 26명이나 됐다.

국방부의 기록에 따르면 1968년 2월 7일 청룡부대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로 빼앗긴 호이안 탈환작전을 벌였다. 사망자들이 학살된 것인지, 작전 중 일어난 대민 피해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은 사실로 보였다.

현지에서 10년째 활동 중인 오덕 베트남 농촌발전후원연구원 국제대표는 "중부 지역에는 한국군에 대한 격한 기억들이 많다"고 전했다. 현지인 번(53)씨는 "베트남인도 캄보디아에 가서 만행을 저질렀고, 한국은 일본에 당한 과거가 있다"며 "전쟁은 이런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군은 베트남 파병에서 5,000명 이상이 전사·사망하고 부상자가 1만여명이 넘었지만, 적 사살 4만여명, 포로 4,600여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국 정부는 다낭에 IT대학을 설립하는 등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 지역을 중점지원하고 있다.

다낭=이태규기자 tglee@hk.co.kr

■ 한국군 주요 전투/ 8년간 1,100여회 전투 전사자만 5,000명 넘어

맹호부대 1연대 3중대는 베트남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인 1965년 10월 29일 베트콩과의 첫 전투를 치렀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베트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한국 전투부대는 1973년 철수 전까지 모두 1,1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작전을 수행했다. 한국군은 미군처럼 최신예 무기로 무장하지 못했어도 적절한 전술과 특유의 용맹성으로 가는 곳마다 전과를 올렸다.

맹호부대는 주둔 2년째인 1966년 9월, 600여㎢의 넓은 지역을 베트콩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맹위를 떨쳤다. 베트남 중부의 광활한 고보이 평야에 진주한 맹호부대를 피해 인근 푸깟 산악지대로 은신한 베트콩을 소탕하는 데는 공중폭격도 소용없었다. 천연동굴과 암석지대로 된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맹호부대는 일명 ‘깔아뭉개기’ 작전을 활용했다. 헬기 등으로 300여c 고지의 동굴요새에 접근한 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동굴을 하나씩 점령해 나간 것이다. 동굴 속으로 가스를 살포해 베트콩들을 제압하는 방식은 특히 주효했다. 약 한 달 반에 걸쳐 계속된 작전으로 맹호부대는 1,000여명의 베트콩을 사살하고 500여명을 생포해 산악근거지를 소탕, 이 일대를 안정지역으로 만들었다. 작전이 수행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부대를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청룡부대는 1개 대대 병력으로 2개 연대를 막아낸 ‘짜빈동 전투’로 ‘귀신잡는 해병’의 명성을 얻었다. 베트남 중부 해안지대를 오르내리며 작전하던 청룡부대 11중대가 쭈라이 지역으로 이동해 짜빈동 마을에 전술기지를 마련한 것은 1966년 9월. 이듬해 1월 북베트남 1개 사단이 이 지역으로 침투해 위기가 고조되던 중 2월 14일 야음을 틈타 북베트남 정규군 1개 연대와 지방의 베트콩부대가 합동으로 기습했다.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치열한 교전에서 기지의 약 4분의 1이 점령당했지만 청룡부대는 밀려드는 베트콩과 삽으로 육탄전을 해가며 모두 막아냈다. 날이 밝아 확인한 적 사망자는 243명, 우리측 전사자는 15명.

그러나 치열한 전투과정에 아군이 뼈아픈 피해를 입은 전투도 적지 않았다. 미국과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상이 한창이던 1972년 4월 맹호부대는 주둔지 뀌년을 북서쪽으로 잇는 ‘안케고개’의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악전고투해야 했다. 수천발의 포탄과 네이팜탄에도 끄덕없는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헬기로 이동한 1개 중대가 적진에 고립되는가 하면 증원부대 중대장이 적의 포탄에 숨지기도 했다. 난공불락의 고지는 포병의 집중사격에 2주일 만에 되찾았지만 맹호부대원 74명이 희생된 뒤였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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