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의 학림사(鶴林寺)는 일년 365일 죽비소리가 그칠 날이 없는, 전국에서 유일한 수행도량이다. 여름과 겨울의 안거(安居)철이 아니더라도 학림사 오등선원에는 젊은 수좌 10여명이 하루도 빠짐 없이 화두와 씨름하고 있다. 화두참구(參究)는 길 없는 길(無路之路)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서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학림사의 조실이 대원(大元·64) 스님이다. 대원 스님은 그들을 피안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자비로운 뱃사공이다. 눈 밝은 납자들의 발심(發心)으로 산사에는 늘 푸른 빛이 감돈다.
학림사는 계룡산의 한 줄기 수리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가 지석골" 이라는 주민들의 말투가 정겹다. ‘지석골’은 제석골의 충청도 사투리다. 불교설화에 등장하는 하늘의 왕 제석천(帝釋天)에서 따온 마을 이름으로 조선 중기까지 제석사라는 절이 있었다. 대원 스님이 묵정밭으로 변한 절터에 학림사를 창건한 때가 1986년이니 어느새 20년 세월이 흘러갔다.
"사실 저도 선방에만 앉아 있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세상에 뭐 하나 괴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여기에 터 잡고 살면서 별의 별 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언젠가 한 보살이 찾아왔어요(절집에선 기혼의 여성불자를 흔히 보살이라고 부른다). 대뜸 부부의 궁합이 맞는지를 묻더군요. 실컷 살다가 궁합은 왜 물어요. 이제 와서 맞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지…. 그래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상극이네요, 누구 하나 죽겠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지요, 헤어지는 게 좋겠지요’라며 오히려 억장이 무너지는 말을 합디다. 속으로 아하, 역대 조사들이 이래서 ‘네가 공부가 됐거든 네 자신을 다뤄보라’고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상황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수심 깃든 얼굴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먼저 ‘사람과 돈 문제로 요즘 어려운 일들이 많으시지요’라고 하면,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십니까, 도를 통했다고 들었더니 역시 다르시군요’라고 합니다. 아니 세상사가 돈 아니면 사람 때문에 힘들지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삶이란 모래성처럼 늘 불안하다.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에게, 아내에게, 어느날 다른 여자가, 다른 남자가 생길 수도 있다.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이들이 부모를 배반하기도 한다. 자기의 참모습을 잊고 사는 데서 비롯된 아픔이다.
"사람이 왜 산다고 생각합니까?" 느닷없는 물음이 곤혹스럽다. "목숨이 있으니까, 살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살다가 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지요. 대개는 반쪽 인생을 살다가 간다고 보면 틀림없을 겁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 다른 한쪽이 자기의 참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욕망의 충족이 행복인줄 착각한다. 스님은 그러나 욕망도 마음먹기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스님은 기복신앙을 크게 경계한다. 자기만을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둔 기복신앙은 곧잘 비수가 되어 남에게 해를 입힌다. 입시철만 되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을 찾는 학부모의 기도행렬을 보고 스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기도하는 자세부터 달아져야 합니다. 실력이 모자라는 자녀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처님에게 비는 행위는 큰 잘못입니다. 부처님에게 입시부정을 저지르라는 말이나 다름 없지요.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실력 있는 학생이라고 해도 뜻하지 아니한 변수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수행은 그러한 욕망의 칼을 활인검(活人劍)으로 바꾼다. 그러니 참선을 불교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참선이란 나의 존재가, 나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참선을 하면서도 내 사업이 잘 될까,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벼슬도 높아지고 바라는 대로 모든 게 잘 돼야 할 텐데,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욕망을 채우고 소원성취를 위해 참선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삶의 가치는 모양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스님의 말이 이어진다. 대통령은 빈틈없이 국정을 살피고 기업가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학자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자. 다만 대통령 기업가 학자라는 상(相·모양)에 머무르지 말자. 그런 상에 집착해 누군가의 남편, 아들, 그리고 한 사람의 국민이라는 인연을 잊지 말라는 주문인 것이다.
"살다가 난관에 봉착하면 모든 것을 뒤집어 써보세요. 비록 자기의 책임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바보, 그 것도 큰 바보(大愚)가 되어 보라는 게 아닌가. 스스로 바보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보의 마음에선 욕망이 자랄 수 없다. 바보는 곧 크게 죽는 사람이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을 여읜 마음을 가리킨다.
스님이 일반인을 위해 오등시민선원을 지어 개방한 까닭도 언젠가는 큰 바보의 뜻을 한번쯤 생각해 달라는 바람일지 모른다. 그러한 마음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다. 유달리 스승 복이 많지 않았던가.
깨달음에 목이 타던 스님이 어느 해 고봉(高峰) 선사를 찾아갔다. 선사의 회상에서 수행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선사가 ‘곡차’를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곡차만 드는 날이면 밤마다 다리를 주물러야 했다. 참다 못해 걸망을 챙겼다. "공부도 마치지 않았는데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대선지식이라고 찾아왔는데 …, 그만 가보겠습니다"라며 등을 돌렸다. 그 순간 할이 날아왔다.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 있더냐. 나한테 있는 법만 배우면 됐지, 내 껍데기를 보고 시시비비 분별하다니. 바닷물이 더럽다고 안 받아들이고 깨끗하다고 받아들이더냐? 그런 마음을 갖고서는 공부를 못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원 스님의 방 한 구석에는 주장자가 세워져 있다. 스님은 법상에 오르면 주장자를 설법의 도구로 즐겨 활용한다. 주장자는 불법의 상징이자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삶을 지시하는 지팡이다. 도덕적 품성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이 이류중행이다. 주장자는 대원 스님의 삶의 모습을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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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 스님은
행자시절 대원 스님의 별명은 대근기(大根機) 였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타고난 재질과 능력을 근기라고 이름하는데 대근기는 수행자라면 누구나 갖추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5세 때 고향인 경북 상주의 남장사에서 머리를 깎은 스님은 출가 첫날부터 공양주(밥짓는 소임)를 맡아야 했다. 나이가 제일 어리니 궂은 일은 스님에게 돌아왔다. 5년간 주지 스님의 꾸지람을 견디다 못해 다른 절로 떠난 행자를 합하면 500명이 넘는다. 그러나 대원 스님은 공양주는 물론 채공(菜供·반찬 만드는 일)과 갱두(羹頭·국 끓이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런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나중에 스님은 고암(古菴) 전 조계종 종정을 은사로 만난다. 스님은 고암 선사의 법을 이은 법제자다.
"제가 가끔 초청을 받아 미국의 선센터 등에 가서 참선을 지도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인들은 ‘참선을 하는 종주국이 한국인데 한국인들은 왜 참선을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나쁜 점만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국인들도 물질문명의 폐해를 잘 알고 의식의 때를 벗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절집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스님이 마냥 좋아 뒤를 따라다니다가 숱하게 지각을 했다. 결국 중학교를 마치고 출가의 꿈을 이루었다. 선방수좌 시절 군에 입대한 스님은 청와대 경호실에 배속을 받았고 그 때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그 말을 마친 스님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인연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주는 미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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