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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하는가] (7) 한문학자 임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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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하는가] (7) 한문학자 임형택

입력
2005.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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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턴가 취미란에는 ‘도서 수집’이라고 적어 넣기로 하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신상명세서 따위를 작성해야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는데 딱히 취미라고 할 것을 마련하지 못한 나로서는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취미’라고 적기도 무엇하여, 마침내 나의 취미는 도서수집으로 낙착되었다. 나도 젊은 시절에 한 때는 장기판에 골몰해도 보았고 어른들이 두는 순장바둑을 옆에서 구경하여 바둑 두기는 어려서 배워 두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도 저도 세월이 갈수록 취미가 붙질 않고 도리어 시들해졌다. 나의 일상은 책 읽고 글 쓰는 일 이외에 이렇다 할 취미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명색 학자라는 주제에 ‘독서’를 취미라고 내세울 수야 없지 않은가.

사실은 도서 수집 또한 독서와 직결되는 일이므로 나의 취미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는 면이 분명히 있다. 나는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찾아 이따금 인사동의 고서점엘 들르곤 한다. 물론 학자로서 지식을 넓히거나 연구자로서 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이다. 그런데 고서더미를 들추다 보면 나의 연구에 직접 소용이 닿는 것은 아니더라도 저절로 관심이 끌려서 구입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책 자체가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내 생활에서 고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찾는 일은 일종의 취미처럼 되긴 하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책을 찾는 일이 전업인 공부에 관계되는지, 여가의 취미에 속하는 일인지 구분 짓기 실로 애매하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공부는 취미가 있어야 계속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이 물음의 답을 대기에 앞서 공부란 원래 무슨 말이었던가를 현학적이지 않은 범위에서 언급해 볼까 한다. 한국어에서 학업을 뜻하는 공부란 말이 중국어에선 ‘쿵후’로 무술을 지칭하고 있다. 같은 어휘가 서로 천리나 다른 뜻으로 쓰여서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원래 工夫(공부)는 사람이 무슨 일에건 노력하고 연마하는 것을 가리켰던 듯하다. ‘글공부’니, ‘소리공부’니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니 하는 우리말의 여러 용례들이 공부의 본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에 이르러 이 말은 주로 학문 수양에 관련해서 쓰였는데 우리 조선조의 도학자들 역시 이 뜻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 학문전통을 이어서 한국어의 공부란 말뜻이 정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원적으로 보아 공부라고 하면 지식의 습득에 그치지 않고 저 자신에게 체득되어야 함이 긴요하다. 이런 공부의 본뜻에 비추어 보면 인간 앞에 만사가 공부 아닌 것이 없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성실한 인간의 자세라고 이를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학문연구를 택해서 공부를 하느냐? 현대의 학문분야는 넓어 실용적이고 새로운 것이 허다한데 하필 고리타분하게 한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어디 있느냐? 간단히 말해서 내가 좋아서 할 따름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공부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어야 한다. 때문에 위에서 전공과 취미는 둘이 아닌 하나로 합쳐져야 바람직하다는 뜻으로 말했던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형태를 보면 공부하는 것과 노는 것은 마치 물과 불처럼 분리되어 있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라고 당연시하여 가르친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공부하는 것이 노는 것이요, 노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공부도 재미있어 지속적으로 할 수 있고 노는 것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전래 어법에서 논다(遊)는 말을 공부한다와 통용해 썼던 것은 곧 옛 사람들의 지혜라고 생각된다.

공부는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둔다는 뜻도 된다. 저 하기 싫으면 관둬도 좋단 말인가. 현실에 비추어 어폐가 있는 말로 생각되기도 한다. 학문이 골치 아프면 스포츠에 열을 올려도 무방하고, 춤을 춰도 탓할 일이 아니요, 돈벌이에 힘을 쓰는 것은 온 세상이 권장하는 일이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극히 좁은 학교과정에까지 적용하기 어려운 데 있다. 나 자신의 경험으로 고등학교 과정이 되게 괴로웠다. 일류대학을 들어가야 한다고 몰아치는 공부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 활로를 찾아 문학으로 빠져들었다. 문학작품을 읽고 쓰기에 재미를 붙여서, 교과공부는 시험이 코앞에 닥칠 때 벼락치기로 해서 그렁저렁 넘길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대학의 문을 진입하였으니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대학은 나에게 살판이나 만난 듯 싶었다. 약간의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전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골라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창작이 아닌 연구로 방향을 바꿔 한국문학의 한 분야로서 한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된다. 문학을 연구하고 창작하는 것은 물론 길이 다르다. 그렇지만 이 역시 양자는 상통해야 하는 바 연구 또한 창작의 자유를 영혼으로 간직해야 할 뿐 아니라 작품처럼 미적 완성도를 갖춰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문학의 창작에서 연구로 길을 바꾼 것이 나에게는 그게 그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한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사실은 좀더 설명을 요청하는 대목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부는 배워서 알기 위해 하는 것이다. 우주 간의 물사(物事)는 모르는 것으로 두루 가득 차 있거늘 어느 겨를에 다 공부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도 제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자고 말했거니와, 아무리 하고 싶더라도 추구하고 싶은 그 지식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세기 한국의 근대는 한문유산을 거의 방치하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글쓰기는 대부분 한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 정신문화의 최대 보고인 규장각의 장서를 두고 말하더라도 한문으로 씌어진 책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방대한 유산을 스스로 포기하고 사장시켜도 좋을까. 나는, ‘한국문학’의 범위에서 한문학을 제외시킨 개념설정에 문제점이 크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한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긴요하다, 대개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서 지금까지 한문학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해 왔다.

한국문학사는 한문학을 제외시킴으로 인해서 사적 체계를 세우기 어려울 만큼 스스로 빈약해졌다. 한문학영역으로의 지식확대는 곧 우리 문학사의 체계화인 동시에 민족의 정신적 자산의 풍부화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음이 물론이다. 이는 중요한 과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의 한문학 공부는 여기에 그치지 말고 발본적으로, 도전적으로 나가야 비로소 큰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한문학을 소외시킨 근대학문의 틀에 순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지금은 도전해서 지식의 새판짜기를 해볼 만한 때다. 나아가서 비뚤어진 질곡의 근대를 극복하는 과제가 진정으로 요망되고 있다. 이 거대한 지적 도발이 한문학공부에서 창출될 수 없을까? 한문학 속에 무슨 손오공의 여의봉같은 묘수라도 숨겨져 있단 말인가. 그런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지적 도발’, 그 자체로서 공부인데 근대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깨달음의 원천이 한문학에는 풍부히 내재한다는 이야기다. 문학의 근대적 개념을 해체하여 사상과 역사와 문학을 가로질러 종횡하고 민족주의로 구획된 일국사적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로 인식의 폭을 확장하여 나가는 것이 썩 좋은 방도일 것이다.

요즈음 대학사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세기에 도입된 지식체계가 전면적으로 개편되는 추세에 놓였다. 학자들은 많이들 경쟁의 구도 속에서 바쁘게 돌아치거나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젊은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실정이 이러한데 공부하는 것이 노는 것이라니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고개를 돌릴 사람들이 많은 듯 싶다. 더구나 공부가 재미있어 한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교육제도 속의 공부가 재미있다는 뜻은 아니다. 꽃피는 봄동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한바탕 놀면서 자연을 배울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물량적 경쟁 구도 속으로 학자들을 내모는 학문제도는 원천적으로 잘못이고 부작용이 크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 임형택 교수는

임형택 성균관대 사범대 한문교육학과 교수는 1943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선친은 제도교육은 많이 받지 않았지만 연암과 다산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는 한문에 관심이 없었고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해서야 한문으로 된 전통유산이 찬란한데도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국문학과에는 한문 강의가 없어 그는 신호열 성낙호 같은 재야의 한문학자와 역사학자인 이우성을 찾아 사숙했다. 그 때문에 그 역시 민족문학사연구소 다산연구회 같은 모임을 통해 한문 수학의 다양한 길을 열어놓았다. 특히 실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고 연구하여 한국문학의 근대기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밝히고 실학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시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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