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에 대해 얘기하겠다고 하면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지만, 아직 난 ‘피와 뼈’를 보지 못했다. 따라서 기타노 다케시가 14년 만에 다른 감독의 영화(조연급이었던 ‘배틀 로얄’등은 논외로 하고)에 출연해 오로지 그만이 해보일 수 있는 파워풀한 연기를 펼쳤다는 식의 상찬은 내게 주어진 몫이 아니다. ‘피와 뼈’를 보지 못한 건 순전히 게으름 탓이지만, 왠지 나중에라도 그 영활 ‘기꺼이’ 보게 될 것 같지가 않다. 제목마따나 피가 터지고 뼈를 갈아 마시는 듯한 ‘괴물’ 김준평의 삶을 마주하다 보면 연약한 내 심장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킬는지 심히 두렵기 때문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보게 되면 나는 극중 인물들에 자발없이 흡수되어 현실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한 데미지를 받는다. 폭력의 강도 보다는 소위 ‘기타노 블루’라 불리는 모노톤의 이미지와 군더더기 없이 인물의 내면을 투사해내는 통렬한 캐릭터 구성력이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의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탓이다. 그건 사망 직전에 경험하게 된다는 세상에 대한 전면적 이해, 풍경 자체로 물화(物化)하는 육체의 최종지점을 연상케 한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내게 일종의 임사체험과도 같다.
막상 빠져들면 엄청난 매혹이지만, 짐짓 제 발로 먼저 들어서기엔 두려움이 앞선다. 더욱이 허약한 이성을 지닌 내게 기타노 다케시의 광포한 비장미는 매혹 이상의 육체적 전율을 제공한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매사에 비장하고 단호해진다. 무협지에 빠진 사춘기의 망상과 다를 바 없는 그러한 과잉심리가 버거워 나는 가급적 기타노 다케시와 상면하길 꺼리게 된다. 일본의 전설적인 맹인무사 이야기를 다케시 식으로 그려낸 ‘자토이치’를 보고 나서 한동안 남몰래 장님행세를 하고 다녔을 정도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가장 최근에 접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지난 겨울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몽환적인 러브스토리 ‘돌스’(2002)이다. 그런데 서로의 몸에 빨간 끈을 매단 채 넋 나간 표정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거지 연인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 아름다운 영화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깼을 땐 영화가 막 끝난 시점이었는데, 잠들어 있는 동안 드문드문 눈을 뜨고 마주친 풍경들은 그야말로 꿈속처럼 아늑하고 신비로웠다. 잠결에 느꼈던 그 스산하고 공허한 아름다움의 잔상이 하도 끈질겨 얼마 전 다시 찾아 보게 되었다. 단호한 폭력과 비틀린 유머가 혼융된 기타노 다케시의 전형적인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지만, 감정을 완전히 비워놓은 채 외부 풍경의 변화만으로 사람의 마음에 선연한 칼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 ‘돌스’ 역시 기타노 다케시의 특장이 예리하게 드러난 영화라 할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돌스’에서 사랑이란 이기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특유의 독설을 명징하게 변화하는 일본의 사계절 풍광 속에 녹여내고 있다. 기존의 ‘기타노 블루’를 벗어나 매우 다채롭고 수려한 영상미를 과시하고 있는데 세 쌍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변화하는 각 계절의 풍경들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집착과 비뚤어진 애정의 파국을 냉엄하게 직시하며 절절한 비극미를 이끌어낸다. 풍경은 마치 인간의 비극을 거름 삼아 저만의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생기를 뿜어내는 듯하다.
사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감정 따위와는 무관하게 저 혼자 득의만면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영혼이 거칠고 황폐할수록 그를 둘러싼 세계의 풍경은 감춰진 정수를 내뿜으며 방만하게 융성한다. 비극을 고무하는 풍경 앞에서 인간의 절규는 한낱 새의 지저귐에도 못 미치는 미미한 자연음에 불과하다. 개인의 고통과 비극, 그리고 근원적인 소외감을 악문 채 다케시의 주인공들이 폭력에 몰두하는 건 그런 이유다.
폭력은 인간의 절망과 허무를 가장 효과적으로 현시하는 방법론이다. 영화들이 인간의 비극을 표현하는 매개로 폭력을 끌어들이는 건 그만큼 극명한 ‘그림’이 나와주기 때문이다. 폭력이 세계와의 불화를 보여주는 영화적 방식이라면, 섹스는 잠정적인 합일과 위안, 그리고 직접적인 쾌락을 구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런데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섹스는 거의 전무하다. 존재하더라도 삶을 파괴로 이끄는 허튼 에너지의 낭비로 드러난다. 섹스에 몰두하는 바보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모두 하고 있습니까?’(1995)는 기타노 다케시가 섹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냉소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섹스에 대한 무심 내지는 경멸은 ‘소나티네’(1993)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조직 내 반대파들의 공격을 피해 해변으로 피신한 주인공이 길에서 만난 한 젊은 여인의 유혹을 그저 씨익 웃고는 외면해버리는 장면이다. 그 웃음은 의외로 따뜻하고 적의 없어 보이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주인공이 그 여인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이 결국엔 ‘사랑 비슷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기타노 다케시는 감정이란 ‘딱 거기까지’가 진실이란 걸 알고 있다. 그건 기중기에 사람을 매달아 강물에 처박아 넣으면서도 일체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심사와 동질의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에게 잔혹함과 연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잔혹함이 그가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라면 연민은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그 팽팽한 긴장이 아니라면 세상이 품고 있는 적대감 앞에서 이 단신의 단독자는 항상 분루만을 삼켜야 한다. 감정이란 삭이면 삭일수록 더더욱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 진실의 끝은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나 비참이라는 식의 직접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진실이란 그저 언제나처럼 거기에 있으면서 바람이 부는 대로 파문을 일으키는 바다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타노 다케시가 가장 따뜻한 그림을 그려낼 때 그는 늘 바다와 함께 있다. ‘소나티네’와 ‘하나비’ 등에서 낭자했던 유혈이 따뜻한 유머와 순수한 안식으로 일순간 해소되는 지점도 바다이고 이 무뚝뚝하고 냉혹한 어른을 소년과 교감하게 만드는 ‘기쿠지로의 여름’(1997)이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소년이 비로소 영혼의 해갈을 맛보게 되는 ‘그 해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는 숫제 바다 자체가 주인공으로 나선 침묵의 서정시와도 같다. 그의 도저한 폭력성과 냉혹한 독설은 아마도 거대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바다로 가기 위한 그만의 뱃삯인지도 모른다.
얘기를 풀어 놓다 보니 기타노 다케시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총평 같은 게 되어버렸는데,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몹쓸(?) 감정에 대해서이다. 간단히 말해 ‘연정’같은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바다 건너 아저씨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게 난센스라는 걸 알지만 그 말 말고는 그의 영화를 대할 때 느끼게 되는 복잡오묘한 심리를 잘 설명할 수가 없다. ‘피와 뼈’를 보지 못한 이유 중엔 그의 살벌한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포스터에 지레 질려버린 탓도 있다. 그에게서 나는 징그럽게도 달아나고 싶지만 끝끝내 품에 안길 수밖에 없는 악마 같은 사랑의 초상을 느낀다.
안기고 싶다고 했지만, 이게 단순히 마음의 유약함이나 과민한 애증만을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지인들과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성적(性的) 연모를 과격한 농담조로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게 딱히 농담만도 아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철부지처럼 여겨져도 할 수 없지만, 내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무엇보다 물질적인 장악력을 강하게 내뿜는 육체의 자장(磁場) 안에서 강렬하게 작용한다. 예술작품에서 그 사람의 영혼이 느껴진다는 상찬을 비틀어 말하자면, 나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서 그의 강직하고 에누리 없는 육체의 질긴 물성(物性)을 에로틱하게 체험한다.
그는 정작 인간의 삿된 감정과 집착을 영혼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그 엄정한 자기통제와 과묵한 집중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역설적인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그 대상은 가까이 가려 할수록 더더욱 냉혹해지기에 정념에 휩싸인 이쪽의 마음만 애닯아진다. 이 유구한 음양질서의 반복운동 속에서 기타노 다케시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안기는 자의 편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허무와 우주적인 소외감과 교신하는 그의 육체는 텅 비어 있다. 유머와 폭력이라는 상극적인 심상이 동시에 발원하는 그 텅 빈 지점을 바라보며 발정한 여인네처럼 육체의 화덕이 달아오르는 건 무슨 얄궂은 자연의 조화이더냐. 섹시한 당신, 그 크고 투박한 손으로 이 무모한 정념덩어리의 머리통이나 한대 갈겨 주시구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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