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 결에 한 마리 낯선 야수와 맞닥뜨린 순간의, 불가해한 기대를 동반한 팽팽한 긴장감. 마루야마 겐지(사진)는, 거친 수컷들의, 지성이 아닌 정신을, 정신이 아닌 근육의 꿈틀거림으로 담아내는 소설가다. 그의 새 소설 ‘납장미’가 나왔다.
‘도주의 달인 겐조’. 절도단과 폭력단 두 조직을 결속해 뒤에서 조종한 전대미문의 야쿠자 두목. 그는 15년의 형기를 마친 노쇠한 몸으로 외딴 섬 ‘회귀도’로 귀향한다. 늙은 짐승이 운명에 순응하듯, 하지만 ‘골수 무법자 특유의 위협적인 피’를 지닌 채. 소설은 겐조가 살해 위협과 죽은 줄 알았던 딸과의 대면, 자신을 대하는 섬 주민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 대응하며 보낸 여름 한 철의 이야기다. 장기 독방 복역을 통해 악행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마된 ‘심안(心眼)’으로 "시적인 정서로 뒤덮인 온화한 풍치를 망아의 눈길로" 응시하고자 했던 이 늙은 야쿠자의 요동치는 내면의 기록이다. 출소 뒤의 나른한 꿈이 예고살인의 협박 앞에 ‘찰나적 삶’으로 전락하고, 억눌러 온 ‘수컷의 폭력성’이 ‘영혼의 깊은 속살까지 육박하는 격진’으로 분출하는 과정의 고백이다. "범죄의 오의를 죄다 알아버린 사내의 눈은 허연 칼날 같은 광채를 내뿜고, 증오해야 할 적대자를 마주했을 때처럼 사적인 보복을 결의했을 때처럼 목숨을 목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악귀 같은 얼굴이 드러난다."(139쪽)
겐조는 작가의 전작(前作)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문학동네)의 주인공 ‘백주 대낮의 긴지’를 연상케 한다. 야쿠자계의 거물을 백주 대낮에 살해하고 피신한 30대의 긴지가 선(경찰)과 악(야쿠자)이라는 두 힘의 틈바구니에 끼여 불안한 내면으로 선악의 실체적 진실을 고뇌했다면, 겐조는 거대한 힘의 폭력 앞에 굴종하는 인간 존재의 왜소함과 그 이면을 직시한다. 고향 길 위에 선 겐조는 "천왕과 그 일파에게 목숨을 바치라는 강요를 받고 일회용으로 던져질 몸뚱이로 전장에 내몰렸던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항구로 향했던"(34쪽) 바로 그 길임을 회상하고, 신사 앞에서는 "(죄와 한을 남기고 숨져간 그들을 순교자인양) 거짓된 신비의 공간에 유폐하고 과장되게 찬양하려 드는 자들이야말로… 마땅한 벌칙조차 없는 실제적인 대 죄인이었다"(93쪽)고 곱씹는다. 겐조는 거대 권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들을 위로하는 대신 ‘반역의 격정’으로 들쑤신다. 소설에서 생명과 사랑과 영원의 상징으로 놓인 장미의 충동적 진홍빛이 그것이다. "생명의 계보는 숭고한 엄정함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나, 그렇다고 무자비한 도태나 선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절망의 수만큼 희망이 있었다."(510쪽)
생명의 이 봄날, 늙은 야쿠자의 스산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까닭도, 생명의 맥락을 통해 그 무게를 느끼기 위함이다. 작가의 표현처럼 "개화 때마다 영원으로 뛰어들어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줄 터인 구극(久極)의" 꽃들이 지금 한창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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