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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홍석현과 DJ

입력
2005.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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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를 몰고 다니려면 가히 전쟁을 치러야 한다. 출퇴근길의 병목 지점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조심조심 앞으로 가다 보면 꼭 옆에서 끼어 드는 차가 있다. 오죽 급하면 그럴까 싶어 기다려 주면 뒤에서 항의성 경적이 울린다. 이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림짐작의 통계가 축적된다.

길게 늘어선 차들을 곁눈질하며 옆 차선으로 달려와서는 병목 지점 바로 앞에서 끼어 들기를 시도하는 차들은 대개 두 부류다. 첫째가 ‘생계형’으로 청과물을 실은 소형트럭이나 손님을 태운 택시다. 좀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 살기 바빠서’가 나름대로의 명분이 된다. 그래서인지 끼어 들기에 대해 별 저항감도 일지 않는다.

‘생계형’ 다음으로 많은 것이 ‘부유형’이다. 배기량 2,500㏄ 이상의 고급 승용차와 외제차 가운데 제대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차가 드물다. 운전기사가 딸린 차는 거의 예외가 없다. 조용히 늘어서서 기다리는 중·소형차를 비웃기라도 하듯 끼어 들어 제 갈 길을 간다. 승용차의 종류가 경제적 지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관관계가 높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부유형’ 끼어 들기는 짜증은 물론 한탄과 낙심까지 자아낸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물적 기반을 갖춘 사람들이 일반 서민 수준의 생활윤리조차 결여한 실상을 보는 듯하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면 어진 마음을 가질 수 없다’(無恒産無恒心)는 ‘맹자(孟子) 말씀’이 허망하다.

비슷한 느낌을 홍석현 주미 대사에게서도 받게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의 시샘이 아니다. 공직자 재산공개에 나타난 그의 재산은 오히려 예상보다 적었다. 그가 말한 ‘출발점의 차이’도 맞다. 귀에 거슬리는 것은 위장전입을 해명하면서 "부동산은 전체 재산의 1%도 안 돼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합법적 부동산 투기조차 문제시하는 도덕적 잣대나 위장전입을 금하는 법의 잣대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전재산의 1%도 안 된다’고 상대적 잣대를 강조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해 법과 도덕의 상대적 잣대가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그의 말과는 정반대로, 손바닥만한 재산을 늘리려고 서민이 전재산을 다 털어넣는 때일 것이다. 위장전입 논란 등으로 낙마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등의 경우와 달리 청와대가 ‘역량과 전문성, 특수성’을 거론하며 그를 감싸는 데서도 상대적 잣대가 엿보인다.

‘숨겨진 딸’ 보도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침묵에도 낙담하게 된다. 오랜 정치 생활로 희석되긴 했지만 아직도 그를 한 시대의 양심과 도덕의 지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보도 내용의 진위에 정확히 답하는 것이야말로 만년의 그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등의 상대적 잣대가 침묵의 이유일 수는 없다.

절대적 사회윤리의 잣대만이 통용되는 세상은 답답하다. 현실적으로 그런 사회는 존재하기도 어렵다. 융통성과 관용이 사회적 미덕이 된 것도 오랜 역사 경험을 통해 인류가 길어올린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용과 그 기초인 상대적 잣대의 적용은 분명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보다 탄력적으로, 강자에게는 보다 엄격하게 도덕성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상대적 잣대의 참된 방향성이다.

그것이 사회적 강자에게까지 확대 적용되려면 상당한 도덕성 축적이 선행돼야 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히틀러 유겐트’ 전력 논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개인의 책임 능력에 대한 관용의 결과인데 독일이 철저한 과거 청산 작업을 축적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사회적 강자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너무 아득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요구는 최소한 약자 수준의 윤리의식이라도 확보, ‘부유형’ 끼어 들기와 같은 사회적 행태만은 중단하라는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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