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조금씩 드니 길가에 피는 봄꽃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저 꽃들 지고 나면 앞으로 다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애틋해진다. 나이 들면 꽃구경이 최고라더니, 이제서야 그 뜻을 조금 알 듯도 하다. 인생 황혼녘의 꽃구경은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할 것인가. 인생은 지고 꽃은 피니 그 순간은 또한 얼마나 종교적일 것인가.
며칠 전 집 앞을 나서다 보니 목련이 제 세상인 듯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어느 청춘인들 아름답지 않을까. 나는 그늘 하나 없는 그 순백의 청춘에 목례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에 미쳤다. "아,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구나. 세상의 모든 주변이 모두 중심이었구나.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기 위해 바동대고 있을 때, 저것들은 저렇듯 유유히 자기들 생을 준비하고 뽐내고 있었구나."
주위를 돌아보니 지천에 꽃들이었다. 먼산 진달래며 길가의 개나리며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아도 저 홀로 아름다웠다. 세상 걱정 접어두고 그 환한 꽃자리에 잠시 누워가고 싶었다.
어제 새벽엔 봄비가 내렸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들은 그 비에 하염없이 졌을 것이다. 비에 꺾이든 바람에 날리든, 모든 것을 각오한 생인 듯 폭죽처럼 터져 나온 벚꽃은 그 생의 정점에서 미련없이 진다. 그 화려하고 짧은 생을 예비하는 봄은 가슴이 서늘하도록 처연하다. 시인 황지우는 그랬다.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 그 때 이미 다 알았다 (‘수은등 아래 벚꽃’ 중)"
이 봄, 모두가 떠나고 없는 벚꽃 진 거리를 한번 거닐어 봐야겠다.
이주엽 음반기획사 JNH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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