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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삶·사랑…'거장의 10년長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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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삶·사랑…'거장의 10년長考'

입력
2005.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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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생일을 맞은 90살 노인이 "자유분방한 밤으로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단골 포주에게 주문을 한다. "처녀여야만 하며, 당장 오늘 밤에 필요하다"고. 이 ‘분방한’ 상상력의 작가가, 올해로 77세인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만일 책 읽기에도 투자-수익의 강퍅한 저울질이 허용된다면, 그의 신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민음사 발행)은 ‘최소위험 최대수익’의 드문 투자처다. 알다시피 그는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이미 1982년 노벨상을 탔고, 그가 구축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후광으로 세계 문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존재다. 그런 그가 20년 넘도록 인터뷰 때마다 쓴다고 호언했고, 10년 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게 이 책이다.

이 같은 정황적 요소들은 접어두더라도 이 책의 투자가치는, 정교한 서사구조와 시적 울림의 문장, 되씹고 씹어 편하게 받아 넘길 수 있도록 담아낸 묵직한 메시지로 하여 어렵지않게 확인된다.

라틴어와 스페인어 교사 경력을 지닌 칼럼니스트로, 평생 독신으로 살며 창녀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90년을 살아 온 ‘나’. 생일날, 그가 만나게 된 파트너는 14살 소녀다. 단추공장에서 하루 200개의 단추다는 일을 ‘형량 치르듯’ 해내며 사는 소녀 가장이다. 공포와 수치심을 잊고자 그녀는 수면제를 먹고 잠든 채 첫 손님인 ‘나’를 기다리고, ‘나’는 그 소녀의 생존을 위한 서툰 유혹의 화장에 돌연 연민을 느낀다.

소설에서 노인과 소녀의 만남은 응시와 사유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노인의 응시는 삶의 원형에 대한 응시이고 자신의 시간에 대한 사유다. "그녀 덕택에 나는 구십 평생 처음으로 나의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 사물과 언어의 질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자신의 무질서에 대한 위장술이며, 약속시간에 대한 강박 역시 타인의 시간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위선이었다. 새롭게 낭만주의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임도 깨닫는다. 욕망을 비운 자리에서 사랑과 질투를 경험하기도 한다.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작가는 회오리를 동반한 남미의 파괴적인 소나기처럼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이 휩쓸고 간 뒤의 내면을 이런 소박한 문장으로 정돈한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작가는, 노인의 ‘오래된 화법’을 사실감 있게 구사하고자 사어(死語)에 가까운 어휘와 표현들을 취재해 작품에 잔뜩 녹여넣어, 젊은 번역자(송병선·울산대 교수)를 진땀 나게 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그 때(‘백년동안의 고독’ 집필 당시)는 기운으로 썼지만 이제는 힘이 달려 테크닉으로 쓴다"던, 그의 고백은 아무래도 엄살이었던 듯 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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