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과 열차 운전사가 나란히 앉아 오페라를 봤고, 끝나면 곳곳에서 품평회가 벌어졌다. 슈퍼마켓 아줌마와 톨스토이 푸슈킨 소설을 놓고 몇 시간씩 토론했다. 김창진(44)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모스크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배를 곯아도 발레 티켓은 사려고 줄 서던 러시아 사람들… 김교수는 그 정열과 자부심이 부러웠다고 했다.
‘러시아 문화의 집’(홈페이지 www.rccs.co.kr, (02)3142-8808)이 오는 29일 개원한다. 김 교수가 원장을 맡아 2004년 10월부터 준비해 온 것이다. 18일 막바지 단장 중인 서울 마포구 서교동 5층 건물에서 만난 김 교수는 "아르바뜨로 갈까요 아니면 루슬란으로…?"라고 했다. 아르바뜨는 모스크바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 루슬란은 푸슈킨의 소설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주인공 이름이다. 러시아 문화의 집 3층 카페와 2층 레스토랑 이름이기도 하다.
루슬란에 들어서니 마트로슈카(러시아 전통 목각 인형)가 반긴다. 벽에는 마야코프스키, 고리키 등 러시아 작가들 초상화가 걸려 있다. "4층은 세미나실이에요. 강의도 하고 영화도 상영하고…. 5층은 원서와 논문 등을 볼 수 있는 자료실이고요." 지난 주 발레리 수히닌 주한 러시아 부대사가 와서 ‘러시아, 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를 주제로 강연하는 등 ‘시사회’도 치렀다.
김 교수가 러시아 문화에 매료된 것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3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볼쇼이극장과 인근 여러 박물관, 미술관은 항상 만원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손 잡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하는 과외선생은 전공자가 아니었는데도 문학 얘기가 평론가 수준이었다.
그런 문화의 풍요를 누리다가 95년 귀국하니 한국은 앙상했다. 예술이 부자와 빈자 모든 사람의 것인 러시아가 그리웠지만 러시아 대사관측에서도 문화원 건립은 계획조차 요원했다. 그래서 사업하는 친구들을 설득했다. "민간이 외국 문화 교류 센터를 세우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거든요. 선례가 없는 만큼 힘들었어요."
이곳은 한국인이 러시아 문화를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인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상반기에 러시아 문화 강연, 러시아어 강좌 등과 함께 국내 거주 러시아인이 참여할 수 있는 한국어 교실, 목판화·전통공예 교실, 무료 법률 상담 등을 진행한다. 국내 오케스트라와 밴드에 소속된 러시아 연주자들이 참여하는 작은 음악회도 개최할 참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왔던 러시아 노래 ‘백학’이 한창 인기였잖아요.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도 러시아 노래를 개사한 것이고요. 요즘엔 테니스 요정 샤라포바에 다들 열광하고. 러시아는 먼 나라가 아니에요." 김 교수는 예술을 사랑하는 러시아의 열정을 우리도 갖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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