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 차질" 위기감…반전 시도
노무현 대통령이 19일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의혹에 대해 특검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의혹을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야당과 언론의 의혹 제기에 소극적으로 임할 경우 DJ 정부 때의 옷 로비 사건처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특히 의혹의 불똥이 대통령 측근들에 튈 경우 참여정부 전반의 도덕성 시비로까지 비화해 국정운영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특검 수용론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더라도 야당이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면서 특검 도입론으로 공세를 취할 것으로 보고 선제 공세를 취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는 4·30 재·보선을 고려한 정치적 계산도 작용하고 있다. 선거 때까지 유전개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을 게 분명한 상황에서 청와대가 떳떳하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도 한 것 같다.
열린우리당이 특검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인데도 노 대통령이 먼저 특검 수용론을 밝힌 것은 위기를 정치적 반전의 기회로 삼는 특유의 스타일이 나타난 것으로도 분석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여당이 청와대나 대통령 측근을 방어하려 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도 정면돌파를 통한 반전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청와대는 "야당도 의혹 제기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단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방어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특검 조사 결과 측근의 연루가 드러나면 분명히 책임을 지우고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언급 만으로 특검이 도입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특검이 도입되려면 여야가 국회에서 관련법을 과반수 의결로 통과시킨 뒤 대통령이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4·30 재·보선 이전에 여야가 합의해 특검이 도입될 수도 있으나 재·보선이 끝난 뒤 선거 결과에 따라 특검 도입 여부가 유동적일 수도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의 특검 언급이 절차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비판도 많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특검 수용 의사를 밝히는 것은 검찰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수사에도 차질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한나라당 요구에 따라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했으나 측근 비리에 대한 특검의 기간 연장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 "수사 시작하자마자 특검 얘기 나오나"/ 검찰, 당혹…섭섭…
노무현 대통령의 철도청 유전개발사업 의혹 사건 특검 수용 언급에 대해 검찰은 정치권의 논의와 상관없이 사건을 수사한다는 원칙을 밝혔지만, 한편으론 편치 않은 속내를 드러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특검법이 통과돼 검찰 수사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때까지는 철저히 수사할 것"이라며 수사의지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박한철 서울중앙지검 3차장도 "특검에 갈 때 가더라도 부실 수사였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철저하고 꼼꼼하게 수사하겠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선 검사들은 ‘검찰 수사를 못 믿겠다’는 야당의 정치공세를 대통령이 받아들였다는 섭섭함을 내비쳤다.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특검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며 "결과를 지켜본 뒤 말하는 게 순서 아니냐"고 말했다. 사실 검찰 내부에선 이미 수사착수 때부터 "어차피 야당이 특검 재수사를 요구할 텐데 굳이 검찰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적잖았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검찰간부는 "이번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권력 실세들의 부정한 행태가 곁가지식으로 불거져 나오면 모를까, 현재로선 감사원이 지적한 업무상 배임 외에 또 다른 혐의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며 "차라리 특검이 먼저 나섰으면 검찰의 부담이 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평검사도 "대통령이 특검 수용 의사를 내비친 마당에 검찰이 뭐라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가뜩이나 의혹만 무성하고 증거는 부실한 사건인데 수사팀의 부담만 커졌다"고 걱정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수사팀은 이날 철도공사 등 12곳에서 압수한 대형상자 26개 분량의 자료를 검토하는 한편 사건의 핵심 인물로 잠적한 전대월 전 코리아크루드오일(KCO) 대표를 추적하는 등 온종일 분주했다. 검찰 수사는 당분간 정치권의 특검 논의와는 무관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 여 "先검찰수사 後특검 의미" 야 "지체없이 특검 수용해야"
여야는 19일 노무현 대통령의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사건에 대한 특별검사제 도입 검토 지시를 놓고 해석을 달리하며 입장 차이를 보였다.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지시가 검찰 수사가 미흡하면 특검을 수용하겠다는 당의 입장을 뒷받침한 것으로 받아들인 반면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특검 수용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섰다.
우리당은 이날 청와대 발표가 나온 직후 처음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노 코멘트’로 일관하다 청와대와의 조율을 거친 뒤 "노 대통령의 지시가 당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오영식 공보담당 원내부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우리당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거쳐 수사결과가 미흡하면 언제든지 특검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고 노 대통령도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당은 (검찰 수사 마무리 이전의) 특검 요구에 반대하고 특검법에 반대 표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정세균 원내대표는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당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뜻이 정면돌파에 있다며 특검법 처리 등 정공법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특검 수용은 당연한 일로 우리당도 지체 없이 이를 받아들이라"며 공세를 강화했다. 박근혜 대표는 "오일게이트에 대한 의혹을 하루 빨리 풀 필요가 있다"며 "특검제를 빨리 받아들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여옥 대변인도 논평에서 "노 대통령의 결정은 오일게이트가 권력 비리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여당도 권력실세가 개입된 사건들에 대해 조건 반사적으로 감싸기를 해온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 역대 5번의 특검 살펴보니/‘권력형 비리’ 檢수사 불신서 시작
지금까지 특검 수사는 모두 5차례 있었다. 이들 특검은 기본적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불신과 불만에서 시작됐다. 검찰 간부가 직접 연루되었거나 권력 실세가 개입된 권력형 비리 의혹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1999년 10월 19일 동시에 출범했던 옷로비 의혹사건 특검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특검은 각각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과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이 핵심 수사 대상이었다. 2001년 12월 ‘이용호 게이트’특검도 신승남 전 검찰총장 등 검찰 간부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권력형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올 때마다 야당은 정권과 검찰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특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대북송금사건은 검찰이 수사유보를 발표해 특검 요구에 힘이 실린 경우이지만, 대통령 측근 비리사건은 대선자금 수사를 둘러싼 정치권의 다툼 끝에 나온 다소 소모적인 수사였다.
때문에 특검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역대 특검 중 비교적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용호 게이트와 대북송금사건 정도다. 옷로비 사건은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 속에서 길을 잃었고, 파업유도 사건은 대검이나 정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을 밝히지 못했으며, 대통령 측근비리 사건은 최도술씨가 받은 금액을 약간 더 확인한 게 고작이었다.
반면 특검에 소요된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몇 달간의 특검활동이 끝나도 확정판결 때까지 공소유지 명목으로 사무실 유지비와 특검 및 특검보에 대한 월급이 지급된다. 이용호 특검에는 4년간 18억 7,822만원이 집행됐으며, 대북송금 특검도 2년간 13억 1,924만원이 집행됐다. 실제 공소유지는 대부분 이첩 받은 검찰이 하지만, 특검과 특검보는 변호사로 복귀한 후에도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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