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3월 31일자에 고종석 객원 논설위원이 쓴 '다시, 국가보안법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제기한 문제를 발전시켜 보려는 시도이다. 고 위원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 주장하였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보안법 폐지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좀더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고 위원은 보안법 폐지를 내버려두자는(좀더 기다릴 수 있다는) 논거의 두 축으로 민생론과 사문화론을 제시하면서 이를 반박했다. 상호 중첩되는 점이 있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세 개의 논거가 더 있는 것 같다. 첫째는 리영희 선생이 제기한 것으로 "무리수를 써서 억지로 통과시켜 봐도 다음 총선에서 지고 다른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또 국회에서 바꿀 수 있다"는 반작용론이다. 둘째는 문화평론가 이재현씨가 제기한 것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는 사멸해가고 분열해가고 있는 보수반동 세력을 굳이 결집시켜 주는 결과만 낳을지도 모른다"는 보수세력 결집론이다.
가장 중요한 건 세 번째의 ‘그림론’이다. 이건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이 제기한 것이다. 유 의원은 나중에 보안법 폐지 초강경파로 돌아서긴 했지만, 지난해 11월 "우리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럴 경우 탄핵 때 같은 후폭풍을 맞아 정치적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한나라당이 보안법 폐지를 막겠다고 하면 여당이 물리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그림이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면 여당에 대한 여론이 매우 나빠질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림이 좋건 안 좋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보안법을 폐지해야 하는가? 그 이전에 더욱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과연 한나라당 의원 다수는 보안법 폐지를 결사 반대하는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에 따르면, 공안 계통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도 사석에선 "국가보안법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당 차원에선 반대하는가? 노 의원은 "위기감을 조성해서 자신들의 좁아져 가는 지지기반을 유지·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의외로 협상의 여지는 크다고 볼 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 건 노무현 정권에게 있어서 보안법 폐지는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을 축소시켜 나가는 정권 재창출 전략의 하위 ‘개혁’이라는 점이다. 노 정권은 한나라당이 ‘수구 꼴통’ 이미지를 갖게끔 하는 것이 최상의 재집권 전략임을 잘 알고 있다. 시종일관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망정 노 정권은 보안법 문제마저도 그 용도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흔히 ‘전술적 오류’로 불리는 노 정권의 아마추어리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김영삼·김대중 정권을 능가하는 노 정권의 정치공학 프로페셔널리즘 때문에 보안법 문제가 더 꼬였다는 가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장 노 대통령부터가 겸허하고 진실된 자세로 야당의 협조를 구한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윽박지르듯이 한나라당을 몰아붙였다. 그건 한나라당에게 보안법 반대를 격렬하게 해달라는 주문이나 다름 없었다.
유 의원은 보안법 폐지의 물리적 강행론을 반대하다가 한 달 만에 초강경파로 돌아서 국회의장 선출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국회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과격함을 보였다. 그게 단지 그들의 ‘성질’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까?
노 정권에 대한 이해는 늘 노 정권과 열성 지지자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지면 그들은 흩어지게 돼 있다. 노 정권의 입장에선 한나라당이 늘 노 정권 지지세력이 똘똘 뭉쳐야 할 일만 만들어 주고 있으니 내심 한나라당을 업어주고 싶을 게다. 겉으론 한나라당 욕하며 핏대 올리면 지지자는 더 늘어나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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