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라고 번역되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탄생한 용어다. 한스 콘과 같은 학자들은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민족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했으며 따라서 기껏해야 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최근 현상이다.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 과정에서는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지적된다. 이들의 이론은 많은 한계를 갖고 있지만 민족이 절대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 민족주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려는 국민주의는 긍정적인 민족주의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표방하며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많은 폐해를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국의 팽창과 강대화를 위해 타민족을 침략하고 억압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다. 이에 저항하여 자국의 독립과 국가형성을 주장한 사상이나 운동은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불린다.
■ 최근 유럽에서는 근대국가의 주권과 국경을 기초로 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인 경제 통합과정을 밟아 이제 주권의 일부까지 넘어서는 정치 통합단계에 와 있다. 이는 탈근대의 사상적 문화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민족주의를 넘어서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왔다. 갈등과 대립을 낳는 혈통, 영토를 넘어 포스트 민족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민족주의의 토대인 국사를 해체하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 그러나 최근 한중일 3국에서 몰아치는 민족주의 바람은 동북아에서 민족주의를 넘어서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권적 질서가 추구되고 있는 동북아에는 강력한 민족주의 수요가 존재한다. 분단, 영토, 역사 문제 등에 발목을 잡혀 아직 근대국가의 완성이 이뤄지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동북아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무역과 투자, 그리고 다방면의 교류가 파국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낙관하기엔 이르다. 고삐 풀린 민족주의를 통제할 지혜가 없을까.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