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래부 칼럼] 과거에 눈 감는 자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래부 칼럼] 과거에 눈 감는 자는…

입력
2005.04.19 00:00
0 0

일본인의 천황에 대한 생각은 놀랍기만 하다. 잡지 ‘치세이(知性)’가 전후의 의식조사를 비교한 바에 따르면, 그의 이미지는 2차대전 패망과 함께 급전직하했다. 전전(戰前)에는 천황을 ‘신이라 생각한다’ ‘신은 아니지만 보통인간 이상이다’가 87.3%나 차지했다. 장기간 대중조작을 한 결과 철저히 우민화한 것이다. 전후에는 같은 응답이 15.2%로 주저앉았다. 천황은 신에서 인간의 자리로 추락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알렸다. ‘…모든 신민은 먼 장래를 바라보면서,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고 한 가족처럼 결속을 다져야 한다. 세계 진운에 뒤 처지지 않게 제국에게 주어진 영광을 고양시키도록 단호한 결의로 매진하자.’ 일본인은 눈물을 흘리며 방송을 들었으나, 항복·패전 등의 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도 없었다. 적의 새롭고 잔학한 폭탄사용으로 유례없는 희생자가 났다는 등 자기변명으로 일관됐다. 60년이 흘러 세계 진운을 따라잡은 것일까? 공식행사에서 다시 ‘히노마루’(일본 국기)가 빠짐없이 올라가고, ‘키미가요’ 합창소리가 높다. 왜곡된 교과서를 통해 주변국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자신의 죄업을 축소하고 있다.

반면 독일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다. 지난 10일에도 슈뢰더 독일 총리는 과거 유대인 수용소마을에서 사죄했다. "우리가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는 가장 수치스러운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과거에 눈 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 멀게 된다’는 명언을 남긴 것도 바이츠 제커 전 대통령이다. 디 벨트지도 최근 일본의 우경화를 비난했다. ‘일본에서 옛 제국의 위대함과 천황 군대의 영웅적 군인을 큰 소리로 선전하는 민족주의 단체가 늘고 있다.’

돌아보면 기실 옛 일본은 위대하지도 않았고 영웅적 군인도 없었다. 모두 허상에 취해 한낱 유치한 그림자놀이를 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림자놀이가 자기 국민과 주변국 국민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일본도 몇 차례 사과는 했다. 그 뒤로는 "도대체 몇 번이나 사과하란 말이냐?"며 신경질을 낸다. 정기적으로 사과하라는 것은 아니다. 진실된 사과는커녕, 다시 지난 상처를 들쑤시지나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론의 명저’라는 일본 책이 있다. 외국인의 글을 모아놓은 그 책에는 이어령씨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과 미국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등이 들어 있다. 일본인의 난해한 정신을 해독하기 위한 책들이다. 이어령씨에 따르면 축소를 지향할 때 일본인은 산업적 성취와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그러나 확장을 지향할 때는 자신과 주변에 위험과 불행을 초래한다.

‘국화와 칼’에서 국화는 미의식을, 칼은 무사도를 상징한다. 베네딕트는 두 개의 대립된 상징을 통해 일본인의 모순된 정신을 들여다본다. 책이 나온 지 반세기 이상 흐르고 경제와 함께 천황숭배도 부활한 반면, 민주주의적 사유는 자라지 않았다. 정치적 미성년자인 일본인의 마음에서는 녹슬지 않은 무사의 칼이 늘 번쩍이고 있다. 일본국민 다수의 정서는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곡예하듯이 건너 뛰곤 한다. 상황에 따라 태도를 돌변하는 그 예측 불가능성이 두려운 것이다.

미국은 전후에 천황제를 포함해서 일본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했어야 했다. 반대로 미국은 점령정책 수행을 위해 천황제를 이용했다. 일본의 진보적인 아사히(朝日)신문은 2001년의 한 사설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다시 결론을 내렸다. 그 아사히는 최근에도 보수적인 산케이(産經)신문과 교과서 왜곡문제를 놓고 연일 치열한 사설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평화와 민주적 양식을 지키기 위한 아사히와 지식인들의 고군분투를 눈 여겨 지켜보고 있다. 거기에 가냘프나마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걸고 있다. parkr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