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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이탁오 평전 - "그래, 난 50세 이전엔 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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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이탁오 평전 - "그래, 난 50세 이전엔 개였소"

입력
2005.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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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가슴이 뜨끔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리 이탁오(李卓吾·본명 이지·1527~1602). 주희의 등등한 권위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던 시절 공자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주장하며 공맹(孔孟)의 적자들을 마음껏 비웃은 사람, 노장사상과 불교, 기독교까지 섭렵하며 가짜 인의(仁義)와 예교(禮敎)를 벗어버리라고 부추긴 아웃사이더,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76세에 감옥에 갇힌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불운아, 주자학에 반기를 들어 지행합일을 주장한 왕수인의 입론을 받든 양명학파, 그 중에서도 좌파에 속하는 학자.

2,500년 중국유학사에서 가장 문제적 인간으로 꼽히는 이탁오의 일생을 조명한 ‘이탁오 평전’이 번역 출간됐다. 주자학 일색의 중국 유학계에 던진 문제제기나 드라마틱한 삶에 비추어 그를 소개한 책이 그간 국내에 거의 없었던 게 좀 어리둥절하다. 그의 저술이나 편지글 등을 모은 대표작 ‘분서(焚書)’가 지난해 김혜경 한밭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게 고작이다. 삶과 학문세계는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 레이 황이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발행)에서, 시마다 겐지가 ‘주자학과 양명학’(까치 발행)에서 각각 ‘자기모순의 철학자’ ‘유학의 반역자’라는 제목을 달아 책의 일부로 소개한 게 모두다. 중국의 시사평론가와 문필가가 공동 저술한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의 ‘이탁오 평전’은 이 반골 학자의 일생을 충실하게 국내에 소개한 첫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학의 말기적 폐단을 ‘유해(劉諧) 칭찬’이라는 글에서 시원스럽게 통박한다. 유해가 공자더러 "형님" 운운하자, 낡은 경전에서 한두 마디 주워 담은 당시 유학자가 "하늘이 중니(仲尼·공자)를 태어나게 하지 않았으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라며 벌컥 화를 냈다. 이건 실은 주희의 말이다. 총명한 유해가 답해서 왈. "중니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촛불 밝혀 길을 다녔겠소이다."

이뿐 아니라 상하질서와 사회윤리가 기틀인 세상을 향해 당당히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길을 가는데 힘쓰라"고 말하고, 공자 말씀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에게 "천지와 인간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최종의 진리란 없으며, 사람마다 모두 자기의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외쳤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으뜸가는 황제라고 칭송하고, 오대(五代) 때의 풍도(馮道) 같은 절개 없는 인물을 칭찬하기도 했다.

기성의 유학자들을 무참히 깨부순 뒤 그가 다시 지어올린 사상의 집은 ‘동심설(童心說)’로 요약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야 말로 참된 마음이며, 이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성인도 진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심이란 거짓 없고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최초 일념의 본심이다. 동심을 잃으면 참된 마음을 잃는 것이며, 참된 마음을 잃으면 참된 사람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참되지 않으면 최초의 본심은 더 이상 전혀 있지 않게 된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기반한 이단의 학설을 용납할 사회가 아닌 줄은 그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쓴 책에다 ‘불태워 버릴 책’(분서) ‘숨겨야 할 책’(藏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탄탄한 문장과 세밀한 고증, 깔끔한 문장이 돋보이는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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