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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몽상가들과 바보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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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몽상가들과 바보들의 행진

입력
2005.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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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현대사에서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기존 체제와 가치에 도전하는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냉전과 베트남전쟁, 경제적 모순, 억압적인 제도와 규범들, …. 인간적 삶과 자유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 젊은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현실에 저항했다. 68년은 그 정점이었다. 프랑스는 ‘5월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학생, 노동자들의 시위와 총파업으로 들끓었고 미국에서도 격렬한 반전시위와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이어지는 반문화 운동이 폭발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도쿄대 야스다강당이 자율을 요구하는 학생들에 의해 점거됐다. 현실과 꿈이 이토록 범세계적으로 충돌한 적은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없었다.

최근 상영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dreamers)’은 정확히 그 때를 다룬 영화다. ‘무삭제’ 심의통과로 호기심을 끌었지만 영화의 느낌은 선정적이기보다는 파스텔화처럼 몽환적이다. 드골 정부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관장 해임에 반대하는 영화광들의 시위현장에서 만난 스무살의 반듯한 미국청년 매튜와 같은 또래의 쌍둥이 프랑스남매 이자벨, 테오의 기이한 동거 상황이 줄거리라면 줄거리다. 매튜는 남매의 분방한 성적 유희와 일탈에 당혹해 하면서도 차츰 그들의 삶의 방식에 이끌려 들어간다. 지미 헨드릭스의 쥐어짜는 기타선율 속에서 그들은 현실에선 용납되지 않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꿈을 꾼다. 마지막에서 그 아슬아슬한 꿈은 유리창을 깨고 날아든 가두시위대의 돌멩이 하나로 화들짝 깨어지고, 거리로 뛰쳐나간 이자벨 남매는 매튜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찰 저지선으로 뛰어든다. 뒤로 에디트 피아프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아니,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가 흐른다.

영화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파격적인 성적 일탈행위마저 당대 철학의 화두였던 ‘욕망과 소외’와 관련한 의미로 읽힌다. 결국 영화는 그 자신 68세대인 베르톨루치가 꾸었던 그 시절 젊음과 꿈에 대한 추억이자 헌사다. 비록 좌절했으되 꿈으로 현실을 바꾸려 했던 그 때, 구호조차 "상상력에게 권력을!"이 아니었던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을 상징화한 우리 영화로는 요절한 천재 하길종이 75년 그려낸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철학과생 병태와 불문과 여학생 영자의 사랑 얘기지만 70년대 암담한 현실과 부유하는 젊음의 고뇌를 도처에 암호처럼 깔아 놓았다. 병태의 부잣집 외아들 친구 영철이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을 떠나 자살하고, 병태가 군에 입대하는 장면은 꿈의 좌절이자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통렬한 저항이기도 하다. 어느 서술보다도 더 진한 공감에 젊은 관객들은 울었다.

우리는 이후 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의 60년대보다도 훨씬 강렬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으나 더 이상 ‘바보들의 행진’과 같은 영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현실이 워낙 다급하고 강퍅했기 때문일까. 우리가 세상을 보고 현실을 읽는 독법은 늘, 그리고 여전히 직설적이다. 직설화법은 현상을 건드리되, 상징과 은유는 더 넓고 깊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문화의 힘이란 아마 그런 것이다. 삭막한 우리의 정치 사회적 현실 또한 이런 부박한 문화적 감수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아. 그 때 그 불안했던 젊음이여. 불온한 꿈에 취했던 그 시절의 몽상가와 바보들에게 다시 축배를.

이준희 문화부장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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