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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일 박사의 미스터리 속의 과학] 아들의 영혼이 새에 깃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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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일 박사의 미스터리 속의 과학] 아들의 영혼이 새에 깃들 수 있을까

입력
2005.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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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창가 나무에 새가 날아오면 죽은 아이가 찾아왔다고 여긴다. TV 다큐멘터리로 방영된 이야기다. 이 아버지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할 때, 많은 시청자도 공감했을 것이다. ‘머리의 이성’은 ‘가슴속 마음’과는 달라 보인다. 이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새를 자식으로 생각할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생물학자는 이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그 마음을 떨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과학은 관찰과 측정에 의해 얻은 자료를 일반화해 자연현상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찾는, 방법론적인 것이다. 저 새에 자식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반화한 후 해석할 자료가 필요하다. 새의 행동이나 자식과 아버지 사이의 특별한 연결이 분석대상(자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물질을 매개로 한다면 측정이 가능하나, 단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만약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없는 ‘무엇’이라면 과학으로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 아버지의 믿음이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다. 이 아버지뿐 아니라 과학적 추리에 익숙한 과학자도, ‘육체가 죽어서도 영원히 계속될 무엇이 있다면 이 영혼이 다른 생물의 몸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이 대단히 흥미 있다고 느낄 수 있다.

1967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조지 월드가 대표적인 예다. 월드(1906~97)는 시각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개구리의 눈이 빛에 반응해 물체를 보는 과정이 사람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실험대 위의 개구리도 눈으로 보아서 아는 걸까’, ‘자신의 존재를 알고 허무를 느끼는가’ 등에 대해선 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과 달리 개구리의 의식을 측정할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의식과 마음, 영혼 등이 뇌의 발달로 진화과정에서 생긴 인간 육체의 속성이기 때문에 뇌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과학으로 존재 여부조차 측정할 수 없는 ‘의식’의 장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월드는 인간의 의식이 입자나 파동으로도 보이며, 장소와 운동이 명확하지 않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장소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월드와 달리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은 의식이 육체적 발현 그 자체라고 여겼다. 그는 사망하기 전 30년 동안 기쁨과 슬픔, 기억과 야망, 개인적 정체 감각과 자유의지 등이 신경 세포와 그 연합 분자가 조합돼 나타내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정해 놓고 연구에 몰두했다. 방법론에서 뇌신경의 시각정보 처리 연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만일 언젠가 크릭의 가설이 입증된다면 그의 노벨 의학상 수상 업적인 DNA 구조 해석이 가져온 생명의 이해나 유전공학보다도 인간에게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영혼이 신경 세포의 발화로 분석이 될 수 있다면, 인간과 신 사이의 특별한 관계나 사후의 생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이 이 땅 위에 발을 붙인 때부터 가져온 ‘신앙’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신앙을 배제하고 과학과 이성의 가치만으로 살겠다는 ‘철학적 자연주의자’ 크릭의 꿈이 달성되는 순간일 것이다.

의식 문제만큼 심각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없다. 이 세상의 흥미로운 미스터리 중 상당수는 육체를 초월한 의식이나 영혼과 관련돼 있다. 영원의 의문에 답해주는 ‘신앙’과 인간성을 황폐화하는 ‘헛된 믿음’ 사이의 경계도 애매하다. 이 모든 것은 신앙적 과학적으로 심각한 문제인 만큼, 찬반 논쟁도 뜨겁다. 앞으로 이 칼럼에서 다룰 내용이다.

과학평론가·전 숙명여대 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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