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육교가 신기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단층집에 살았던 나로서는 육교에 올라가 주변을 굽어보고 육교 밑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의 중심가에 지하도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신기함도 기억 난다. 땅 밑에 불 밝힌 점포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사람들이 왁자하니 지나다니는데 땅 위로는 차들이 달린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었다.
이제는 육교나 지하도가 토목기술과 도시설계의 기념비적 성취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육교나 지하도를 힘겹게 오르내리는 어르신들을 볼 때나, 눈 앞에 보이는 저쪽으로 건너가려고 지하도로 내려갔다가 올라와 보니 엉뚱한 곳이어서 다시 땅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에는 도시설계와 교통정책 담당자들의 비정함과 무신경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거동에 불편이 없는 나도 이럴진대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이나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외출해야 하는 이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많은 사람이 다니는 도시 한복판에 육교나 지하도를 감히 건설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제 보니 몰상식한 짓이었다. 도시는 인간이 오가고, 만나고, 물건을 사고 팔고, 노닐고, 일하는 곳이지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가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도심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신호등 없이 내쳐 달리기를 희망하는 자는 자신의 안락과 효율을 위하여 무수히 많은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이다.
우리의 정책 결정 과정은 불행히도 이들의 희망을 반영하여 도시 전체를 기계 중심의 삭막하고 비인간화된 공간으로 변질시켰다. 넓은 자동차 도로를 도시 한가운데에 이리저리 만들고, 그 길에 건널목 대신 지하도를 설치하여 인간을 땅속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자동차로 이동하시는 분들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도시설계가 이루어진 시점은 흥미롭게도 우리 정치문화가 억압적, 권위주의적으로 비인간화된 때였다. 또한 그때는 돈 있고, 힘 있고, 빽 있는 분들께서 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다행히 육교는 이제 많이 철거되었고 더 이상 새 육교가 도심에 건설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하도는 아직도 일부 도시에서 여전히 건설되고 있다. 더욱이 지하도 건설은 지하상가 개발업자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교통 정책 입안자는 의도적으로 건널목을 없앰으로써 보행자들을 지하로 몰아 넣어 일정량의 유동인구를 지하상가 개발업자에게 확보해 주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개발업자와 손잡고 공공의 안녕과 보행 시민의 편익을 침해하는 이러한 결정이 반복되는 동안 무수한 보행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묵묵히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수고를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넓은 길은 더 많은 자동차를 불러들인다. 지하도와 육교를 건설한다고 해서 도심의 교통 체증이 완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심을 관통하는 넓은 자동차 길은 정겹고 매력적인 보행환경을 파괴하므로 보행인구를 감소시킨다. 그 결과 상점은 쇠퇴하고 구매활동이 위축되어 도심의 황폐화를 불러온다. 몇 차선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넓은 길을 광화문 앞으로 내고, 그 길 한 가운데에 동상을 세워 존경받는 장수를 자동차의 바다 속에 외로이 포위되도록 연출한 도시계획자의 상상력은 그로테스크하다.
자동차에게 빼앗긴 우리의 도시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다. 보행환경을 유린하고 도심을 황폐화시키는 넓은 자동차길, 그리고 자동차의 소통을 위한답시고 사람을 땅 속으로 내리 모는 지하도의 정치학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길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즐기고 교류하고 창조하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매연과 소음과 질주하는 기계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어.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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