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계곡이 그윽하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도 깊은 골짜기를 따라 무심히 흐른다. 여기가 의신(義信)마을, 의신계곡이다. 벽소령 노고단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종주능선의 가운데,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한다. 쌍계사 금당선원 선덕(禪德) 도현(道玄·58) 스님은 의신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에 초막을 짓고 산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에 얹은 초막은 쌍계사에서도 10㎞는 더 들어간 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10분쯤 올라야 정갈한 모습을 드러낸다. "수행자는 나무에 비유하자면 뿌리에 해당합니다. 세상이 원한다고 해서 뿌리가 자꾸 나서면 나무는 죽습니다. 수행자는 어디에 살든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세 평 남짓한 공간에 앉아 "왜 세상에서 멀어지려고 하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방 한 칸에 뜰로 나가는 마루도 놓았다. 마주 앉으면 서로 입김이 닿을 만큼 물리적으론 협소한 공간이지만 집안에 감도는 분위기에 어느새 마음이 넉넉하고 편안해진다. 당연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어두워지면 촛불을 밝히면 그만이다. 스님들은 이처럼 목숨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만 갖춘 초막을 토굴이라 부른다. 하기야 바늘 하나 꽂을 데 없는 궁핍도 수행의 벗이니까.
"저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자연이 들려주는 법문을 들어보라고, 그렇게 말입니다." 새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그 모든 것이 자비로운 부처의 음성이나 다름없을 것 같다. 옛 사람은 노송이 반야(般若·지혜)를 이야기하고 둥지에 앉은 새가 진여(眞如·진리)를 노래한다고 읊었다. 그 심경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그러한 삶을 꾸려 온 지 10년이 넘는다. 부처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스님의 설명을 들어본다.
한 바라문(브라만교의 승려)이 어느날 부처에게 물었다.
"부처님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부처가 대답했다.
"앉다가 서기도 하고, 걷다가 눕기도 합니다."
바라문이 다시 물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부처가 다시 말했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하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을 다하면서도 늘 깨어 있고 스스로를 잘 알며, 모든 일을 원만하게 살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내가 똑같으면서 다른 점입니다." 부처는 이처럼 정념(正念) 수행을 하며 살았다.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현법낙주(現法樂住)의 삶이다. 수행의 도달점이 이런 삶이다.
"우리는 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도 배우고 익힌 업대로 무의식적으로 하지요. 그러다 보니 미처 여과되지 못한 생각이나 말, 행동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후회가 따르게 마련이지요. 하루하루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자기의 주인이 되어 능동적으로 사신 분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지요. 후회하고 되돌아볼 일이 없기에 이 세상에 다시 올 일(윤회)도 없어지고 대해탈의 열반을 누리시게 된 겁니다." 현법낙주의 삶은 무소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물질적으론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적음을 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몸으로는 봉사하고 입으로는 칭찬하고 뜻으로는 연민을 갖는 삶 또한 무소유다.
절집에선 무명이 가장 큰 병통이라고 가르친다. 무명은 곧 어리석음이다. 이 병통을 왜 버리지 못하는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기 때문이지요. 자기반성에 토대를 둔 밝음이 생기면 올바른 판단력이 찾아옵니다.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길이 열리는 거지요. 자기반성에 습관을 들여가면 기쁨에 이어 행복감이 솟아납니다. 행복감은 무슨 일이든 멈춤 없이 일관되게 이끄는 능력을 끌어냅니다. 그러니 판단력이 예리해지고 문제의 해법도 찾기 쉬워집니다. 이게 무명의 쇠사슬을 끊는 지혜의 칼입니다."
선원의 기둥이나 벽에는 ‘照顧脚下(조고각하)’라고 쓰여진 주련(柱聯)이 있다. 발 밑을 보라는 뜻이니 회광반조(廻光返照)와 상통하는 선가의 언어다. 예전엔 스님들이 행각이나 탁발에 나설 때 반드시 삿갓을 썼다. 밖으로 눈을 돌리지 말고 늘 자기를 살펴 조심하라는 경계의 뜻이 삿갓에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슴 여섯 명이 딸린 집을 한 채 갖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머슴이란 망상과 번뇌의 근원인 눈 귀 코 입 몸 뜻을 가리키는 육근(六根)을 말합니다. 집은 몸이지요. 머슴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주인이 오히려 휘둘리게 됩니다. 눈 좋은 데 들어가고 맛 좋은 데 좇아가고… 그래서야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머슴을 잘 다스려야 집이 저절로 건사가 되는 법이지요.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말입니다." 참선은 자칫 방자해질 수 있는 머슴을 다잡는 방편이다. 마음의 주인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이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행복의 길을 일러주는 길잡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가장 작은 조건으로 가장 큰 행복을 갖다 주거든요. 몰라서 그렇지, 우리 마음 속에는 무한한 기쁨과 행복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퍼올려 쓸 줄 몰라 방황하는 겁니다. 저 같은 중이나 목사님, 신부님들이 필요한 까닭이겠지요." 스님은 선의 정신은 ‘바로 지금’이라고 단언한다. 당장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나중에 무엇이 된다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라는 얘기다. 자신에 대해 깨어 있는 순간순간, 이것이 스님이 말하는 ‘찰나열반’ 이다. 그러한 순간을 늘려 가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넓혀가는 게 일상에서의 참선이자 수행이다.
"하나 물어 봅시다. 세상에 구제해야 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있다면 ‘나’라는 요 놈 하나 뿐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제도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화두라고 봅니다. 그리 생각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도 달라집니다."
자신을 구제하는 절대조건이 회광반조다. 자기반성 없이는 마음의 중심을 잡기가 불가능하다. 남을 쳐다보던 눈길을 자기에게로 돌리라는 간곡한 권유다.
깨달음은 실체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말로만 존재할 뿐. 부처의 팔만 사천 법문은 부처도 필요 없는 세상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lkc@hk.co.kr
● 도현 스님은
"나이를 먹어 의지할 데 없이 걸망지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봄날 논두렁 아래서 따뜻한 봄볕을 쬐다가 죽을지라도 ‘이 뭣고’ 라는 본분사, 이것 하나만 잊지 않고 목숨을 거둘 수 있다면 한 생을 중답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도현 스님은 마음의 스승인 전강(田岡) 선사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피안으로 나가는 뱃길을 밝혀준 등대가 되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5년간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법을 체득한 이유도 중답게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사실 부처는 위파사나 수행을 통해 반야를 성취했다. 위파사나는 팔리어인데 ‘위’란 ‘존재의 참모습’, ‘파사나’란 ‘완벽하게 본다’는 의미다. 즉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간화선의 화두 참구하듯 깨우쳐 가는 수행인 것이다. 화두선만이 지고지순한 깨달음의 방편이라고 여기는 조계종 풍토에서 스님은 분명 이례적인 수행자다.
부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동진출가나 다름없는 열 다섯 나이에 범어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가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보낸 것이다. 그렇게 첫 걸음을 뗀 운수행각이 어느덧 4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가 됨을 중국의 임제(臨濟) 선사는 얘기했습니다. 어떤 상황과 마주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요."
선덕은 선방의 어른이다. 여름 겨울 안거철에 후학을 지도하는 기간을 제외하곤 토굴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낸다.
"세상에 나보다 부자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앞산과 뒷산 모두 내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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