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바에는 차라리 증시를 떠나겠다."
상장기업으로서 누리는 혜택보다는 과도한 의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증시를 떠나거나 탈출하려는 기업들이 잇따르고 있다. 11일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매각된 제일은행이 상장 폐지를 추진키로 결의하는 등 올들어 상장회사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해 상장을 폐지했거나 추진 중인 회사가 7개에 달한다.
자진해서 증시를 떠난 상장기업은 2002년 대한알미늄 1개사에 불과했으나, 2003년에 2개사, 지난해에는 한미은행 넥상스코리아 옥션 한일 세아메탈 부산상호저축은행 등 6개사로 늘어났다.
그런데 올들어 불과 4개월 만에 제일은행 세원화성 이수세라믹 한국컴퓨터지주 남성알미늄 등 7개사가 상장을 폐지했거나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이 상장 폐지를 선택하는 것은 증시에서 자본을 조달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드는 대신 상장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수세라믹은 "코스닥시장 상장을 유지할 만한 실익이 없다는데 이사 전원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또 한국컴퓨터는 "주가 부양을 위해 노력했지만 주가는 안 오르고,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는커녕 자사주 매입을 하느라 거액을 쏟아 부어야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요컨대 기업들의 탈 증시 현상은 자본조달의 편의성, 기업 이미지제고, 제품 판매 및 영업 수월성 등의 상장 효과에 비해 금전적 직접비용이나 증권집단소송 공시 등과 관련한 각종 규제비용은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시 주변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인 셈이다.
실제로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의 증시 상장 매력이 크게 낮아져, 전체 상장기업의 24%는 오히려 상장하지 않은 것이 기업에 유리한 상황이다.
지난해 증시에서 월간 누적 거래량이 총 발행주식의 5%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전체의 40%에 달하는 등 상장기업의 약 24%가 상장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거래소 및 코스닥 상장회사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이 각각 0.91과 1.18에 불과, 증시에서 거래되는 주가가 실제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으로 분석됐다.
LG경제연구원 배지헌 선임연구원은 "집단소송제 도입으로 경영투명성 요구가 높아지고 경영진에 대한 법률적 책임부담이 가중될 경우 주가가 낮고 거래량도 적은 중소기업 위주로 상장 폐지가 본격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2002년 7월 기업지배구조 개선 및 회계감사 기준을 강화한 ‘사베인스-옥슬리법’이 시행되기 전 19개월 동안 자진 상장폐지 기업이 93개였으나, 시행 후 18개월 동안에는 142개로 급증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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