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의 화장품 그룹인 로레알은 제품 마케팅에 있어 몇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언제나 단일한 광고로 여심(女心)을 사로잡는다는 것, 광고모델은 프랑스인 영화배우로 한다는 것 등은 로레알의 프라이드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로레알이 자사가 진출한 전 세계 130개 국가 가운데 이 같은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마케팅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한국이다. 로레알도 한국에서 만큼은 프랑스 영화배우가 아닌 한국인 모델을 쓴다. ‘랑콤’의 영화배우 이미연, ‘비오템’의 가수 이효리, ‘메이블린’의 가수 보아가 그들이다.
‘예외는 없다’며 한껏 콧대를 높이던 로레알의 글로벌 광고 전략을 수정하게 만든 것은 로레알코리아의 막강 ‘여성 파워’였다. 로레알의 20대용 브랜드 ‘비오템’의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는 최경애(36) 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경기가 하강 곡선을 그려가던 2003년에 색조 제품을 출시했는데 매출은 꿈쩍도 하지 않지, 경쟁사는 광고비를 4~5배나 쏟아부으며 빅모델을 동원한 CF를 틀어대지, 정말 초조했어요. 남들은 ‘어떻게 본사와 맞설 생각을 했느냐’고 말하지만 솔직히 당시로서는‘그냥 앉아서 실패하느니 한번 질러나 보자’는 절박한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로레알 본사를 설득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한국지사에서조차 "본사의 글로벌 광고전략을 바꾸는게 가능한 일이냐"는 식의 회의가 많았지만 최 이사의 ‘절박감’을 꺾지는 못했다. 최 이사는 로레알 본사와 정면으로 부딪치기 보다는 우회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최 이사는 "광고 모델로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비오템을 쓴다’는 식의 추천 마케팅을 하겠다"고 둘러댄 뒤 이효리가 출연한 1분30초짜리 영상물을 제작하고 CF용으로 만든 15초, 30초짜리 영상물을 별도로 편집해 완성한 뒤 바로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파리 로레알 본사 중역들 앞에서 한국에서 제작해 갖고 간 영상물 시연회를 열자 처음에는 뻣뻣한 태도를 보이던 중역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효리의 건강한 이미지가 비오템 제품 컨셉과 딱 맞는다"는 평이 쏟아졌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최 이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미디어 분석자료를 중역들에게 들이밀었다. "한국의 젊은 소비자들은 TV와 인터넷에 매우 민감하므로 영상광고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최 이사는 결국 "시험삼아 틀어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로레알의 글로벌 광고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결심한지 6개월만에 본사의 마음을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이효리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비오템은 1995년 한국 시장 런칭 이후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화장품 시장이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백화점에서만 화장품 판매가 4% 성장했을 때 비오템은 15%의 두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며 3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년 전 20대 초반 여성들 사이의 인지도는 20%에도 미치지 못해 선호도가 6~7위 수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인지도 30%, 선호도는 2위로 뛰어올랐다.
이 ‘영악한 악바리’ 마케팅 책임자의 ‘질러보자 전법’에 로레알 본사는 두 손을 들고 말았고, 이후 보아와 이미연을 잇따라 모델로 기용했다.
"로레알 본사에서도 이제는 한국지사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에요. 그저 ‘너무 멀리 나가지만 말라’고 하죠. 저는 도전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뿌듯해요."
대학에서 소비자경제학을 전공한 최 이사는 현대자동차 유니레버코리아 등을 거쳐 1998년 메이블린 마케팅담당 과장으로 로레알코리아에 입사한 뒤 올해 1월 이사로 승진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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