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승(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이 달로 4년 임기의 마지막 해를 맞았다. 2002년4월1일 취임한 그는 고희(1936년생)에 중앙은행 총재를 맡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이라고 말한다. 재임 중 한은 위상을 강화한 한은법 개정을 성사시켰고 요즘은 경기마저 살아나는 분위기여서, 내년 이맘 때 마지막 공직에서 명예롭게 물러나는 행운마저 누릴 것 같다.
하지만 박 총재 마음 속엔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 화폐제도 개혁이다. "화폐제도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신념과, "재임중 큰 틀이라도 꼭 만들어 놓고 싶다"는 의욕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주변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화폐제도 개혁의 골자는 리디노미네이션(액면단위변경)과 고액권 발행, 위변조방지 등 세 가지. 화폐액면을 1,000대 1로 바꾸면 고액권을 발행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새 지폐를 만들 때 첨단 위·변조 차단장치를 넣게 돼 리디노미네이션만 시행하면 고액권이나 위·변조 문제는 ‘원샷’에 해결된다는 것이 박 총재의 당초 구상이었다.
그러나 리디노미네이션은 지난해 성사 직전 단계에서 미온적 여론과 재경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박 총재는 지금도 이 대목을 아주 아쉬워한다.
이후 박 총재는 차선책을 택했다. 액면변경은 안 하더라도, 원천적 위·변조 차단을 위해 새 도안의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 1·4분기 발견된 위조지폐는 총 3,153장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324%나 늘어났을 만큼 심각하다.
나아가 새 화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자연스레 10만원짜리 고액권도 발행할 수 있다는 게 박 총재의 생각이다. 화폐제도개혁 3가지 골격 중 2가지(고액권 발행과 위·변조 차단화폐발행)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달 단행된 인사에서 발권국장을 유임시킨 데서도 화폐제도개혁에 대한 그의 ‘강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관건은 재경부의 동의다. 재경부 실무진의 반대는 여전하겠지만, 박 총재로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보다는 한덕수 부총리가 훨씬 호흡과 코드가 잘 맞는 상대라, 내심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마침 두 사람은 지난 주말 일본 오키나와 미주개발은행(IDB)총회에 함께 참석했는데, 여기서 화폐제도 개혁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새 일 벌이기를 꺼리는’ 한은 특유의 분위기에 비춰볼 때 박 총재가 떠나면 화폐제도 개혁은 없던 일이 될 공산이 크다.
과연 그가 남은 1년에 새 화폐제작과 고액권 발행, 혹은 그 둘 중의 하나라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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