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극심한 취업난은 이런 고정관념을 바꿔 놓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웬만하면 백수이고 일선 기업들은 간판보다 당장 활용 가능한 일꾼을 원한다. 대학졸업장은 더 이상 사회 진출에 필요한 자격증이 아니다. 이런 변화를 일찌감치 읽어 내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포기한 채 자기만의 길에 도전하고 있다. 4년이라는 시간과 수천만원의 대학 등록금을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 일찍 투자하는 것이다. 이들 자발 ‘비대생(非大生)’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11일 오전 5시. 정미진(20·여)씨는 어김없이 졸린 눈을 비빈다. 고교생 때라면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그는 서울 목동의 영어회화 학원으로 가서 오전 6시부터 2시간 동안 수업을 듣는다. 학원이 끝나고 오전 8시30분께 서울 강서구 발산동의 한 미용실로 출근해서 일과를 시작한다. 미용도구를 점검하고 청소를 끝내자마자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하루종일 사소한 심부름과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으면서도 시선은 선배 미용사의 손을 줄곧 따라간다. 그는 "허드렛일 같지만 두고 보세요. 몇 년 뒤면 어엿한 헤어숍 사장님이 돼 있을 테니…"라고 야무지게 말한다.
정씨는 서울 세민정보고를 다닐 때 반에서 1, 2등을 다투던 우등생이었다. 그렇다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중견회사 중간 간부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진학에 몰두하던 또래와는 달랐다. 일찌감치 세계적인 뷰티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고교졸업 후 바로 사회에 진출하겠다고 방향을 정했다. 당연히 집에서 반대했다. 대학생인 언니는 "대학에서 네가 하고싶은 전공을 살리면 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그래도 정씨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정씨는 "대학 졸업장이 반드시 인생의 성공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기에 일찍 현장에서 배우는 게 내 꿈을 위해서는 더 빠른 길 같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은 나중에 다녀도 늦지 않잖아요"라고 말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중학교 때 동네 미용실 언니들을 쫓아다니며 재미 삼아 잔일을 배웠고 고교 재학 중에는 방학 기간에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위에서 미용 재주가 탁월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됐고 본인도 미용 일이 너무 재미 있었다. 그래서 대입학원 대신 메이크업학원을 다녔고 2002년 고3 때에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 한 대형 미용실에 정식 취업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머니 옥경희(45)씨는 "공부를 못한다면 모를까 늘 우등생이던 딸이 갑자기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해서 당시에는 속도 많이 상했지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딸 애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게 뒷정리까지 마친 정씨의 귀가 시간은 오후 10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지만 마음만은 상쾌하다. 오늘도 꿈을 향해 하루 더 전진했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앞으로 3년 정도는 이렇게 고단하게 미용 일을 배운 뒤 영국 등으로 선진 미용을 공부하러 떠날 계획이다. 그때를 위해 피곤한 몸이지만 영어학원은 빼놓지 않고 다니고 있다.
그는 "대학 간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러운 생각도 들지만 3~4년만 있으면 아마 그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 할 거라고 확신해요. 그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라고 환하게 웃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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